가문을 빛낸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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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png 지범공 휘 수준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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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범공 휘 수준 신도비명과 서문

 

公의 諱는 壽俊 字는 台徵 號는 龍溪 또 志范이시다 公의 本貫은 全義로 鼻祖는 高麗開國統合三韓翊贊功臣인 太師 諱 棹이시다 中國의 孝子 老萊子처럼 효성을 다하여 百歲老母를 즐겁고 기쁘게 해드려 世宗大王으로부터 几杖과 家傳忠孝 世守仁敬 八字를 下賜받으신 諱貞幹 諡孝靖公이 七代祖이시며 北兵使를 지내셨고 文武兼全하여 世上에서 淸江先生이라 稱頌받았고 淸白吏로 錄選되고 領議政에 贈職되신 諱濟臣의 둘째 아드님으로 一五五九年十一月十五日 서울에서 태어나시었다. 公께서는 아버지 淸江公과 交誼가 깊었던 牛溪 成渾先生의 門下에서 修學하시고 一五七九年 司馬試에 入格 一五九十年 增廣文科에 丙科로 及第하시어 承文院 權知正字 軍資監主簿 司憲府監察 戶曹正郞 通津縣監 禮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 掌樂院僉正 寧海府使 江華府使 奉常寺僉正 司憲府掌令 成均館司成 軍資監正 公州牧使 司甕院正 繕工監正 司僕寺正兼春秋館編修官 承文院判校등의 內外職을 역임하고 一六○五年 通政大夫로 승진하여 吉州牧使 永興大都護府使兼永興鎭管兵馬僉節制使 一六○六年 冬至兼進賀使 副護軍으로 中國 燕京에서 돌아오시는 길 永平에서 병을 얻어 一六○七年三月八日 黃海道 鳳山客館에서 別世하시니 享年 四十九歲이시었다. 五月에 현 加平郡 淸平面 三會里 山六十一番地二號에 葬事 뫼시었다. 公께서는 참으로 波瀾萬丈한 삶을 사셨다. 弱冠의 나이에 北兵使이신 아버지 淸江公이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을 돕고자 임금께 상소하여 허가를 받아 아버지 곁으로 달려가는 憂國衷情의 길을 택한 大丈夫이시었다. 淸江公께서 억울하게 流配되신 울분을 참지못해 득병한 맏형 諱耆俊 負暄公이 一五八三年六月八日 별세하였고 장사도 치르기 전 九日만에 安東權氏 夫人이 별세하는 집안의 불운이 겹쳤고 이러한 傷心이 채 가시기도 전에 유배지의 청강공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喪明之痛의 恨을 품고 득병하신 아버지의 병구완을 위해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약에 타서 드린 孝子였으나 끝내 回春하지 못하시고 十月六日 殞命하시어 머나먼 천리길에서 영구를 서울집으로 운구하여 四月에 장례를 치르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나랏일을 맡을 때도 憂國衷情 일념으로 奉公하여 平難原從功臣一等 임진왜란에 왕을 호송한 공로로 扈聖原從功臣一等 宣武原從功臣一等 淸難原從功臣一等으로 錄勳 되시고 通津縣監 때는 임진왜란에 항거하기 위한 義兵募兵檄文을 지어 독려하시었다. 公께서는 一六二三年 둘째아들 碩基公이 靖社原從功臣一等에 錄勳되어 議政府領議政으로 贈職되시었다 公은 어려운 형편임에도 어린 동생 諱命俊 조카 諱重基 厚基형제를 친자식처럼 공부에 힘쓰고 가풍을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고 訓育하고 成家시키는데 정성을 다하셨음은 지나온 우리 집안 역사를 살펴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 淸江公 장사 때 들어온 賻助金品을 모아 따로 基金을 마련하여 일가들을 도와주어 중국의 范文正公이 행한 뜻을 본받으려 실행하시고 스스로 號를 志范이라 하셨으니 오늘날의 淸江育英事業이 公의 遺志를 받드는 家業으로 발전시켜야 할 일이다. 어머니는 贈貞敬夫人 木川尙氏이니 宣務郞 鵬南의 따님이고 영의정을 지낸 成安公 震의 손녀이다. 첫째부인은 贈貞敬夫人 安東權氏로 同知 恂의 다님이고 領議政 轍의 손녀로 아들 學基를 낳았고 둘째부인은 贈貞敬夫人 陽川許氏로 將仕郞 漑의 딸인데 무후하며 셋째부인은 貞敬夫人 陽川許氏로 承仕郞 昊의 딸이고 아들로는 刑曹正郞으로 지극한 효행으로 孝子로 旌閭되어 左叅贊에 증직되고 아들 行迪이 原從功臣一等으로 叅錄되어 左贊成에 追贈된 碩基를 낳았다 側室에서 아들 형제 딸 형제를 두었는데 晋基는 武科及第하여 僉使이고 興基는 萬戶이다 公의 둘째아들 諱碩基 楊湖公은 後嗣없이 早卒한 兄에게 一六四六年 生員試入格 一六五三年 謁聖文科에 及第하여 司憲府持平 龍岡縣令을 지내고 大司諫에 贈職된 長子 諱行道를 出系承代시키었다 맏아들 諱學基의 夫人은 坡平尹氏로 文科及第한 佐郞 儼의 따님이고 둘째아들 諱碩基의 夫人은 淸州韓氏이다 縣監 師德의 따님이고 判官 漪의 손녀로 贈貞敬夫人이며 四子二女를 두었다. 申象村은 公의 모습이 아버지 淸江公을 닮았고 李月沙는 長者의 風貌를 갖추었다는 글을 남겼으며 楸灘吳允謙 滄浪成文濬 白沙李恒福 於于柳夢寅 稚川尹昉 沙溪金長生 南廓朴東說 月沙李廷龜 秋浦黃慎 守夢鄭曄 晩退軒申應榘 黙齋李貴 仙源金尙容 등 知友들을 살펴도 그 德行이 어떠하였는지 짐작이 된다. 公께서는 下世하신지 四百年이 지나 公을 기리는 宗中에서 墓道를 밝히는 神道碑를 세운다며 鍾濬 會長이 여러번 碑文을 請하여 지식과 글재주가 없어 두려움에도 平素 할아버지께 向한 恭敬하는 마음만은 간직하고 있었기에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용기를 내어 감히 銘을 적는다.

나라를 위함에 아버지를 뫼시고

아버지를 위하여 단지를 하셨네

그 효심 하늘을 올렸는데 슬픔만이 남았고

가난만을 품은채 가업을 이어 받아

가풍을 이어서 가문을 빛내었네.

타고난 장자기풍 대과급제 이루시고

나라위해 앞장서서 충성을 실천하고

배운대로 실행하고 덕행을 쌓으시어

선대에게 욕됨없이 키우시고 가르쳤네.

불운했던 삶의 연속 공에게도 다가와

연경사행이 끝이 되어 불귀의 몸이었네

아! 슬프도다

높은 기개 포부 다 이루지 못하고

한 많은 인생역정 마흔아홉에 접으셨네

 

庚寅(2010)年 正月 全義李氏淸江公派花樹會長 前聯合通信總務局長 十三代傍孫 天浩 삼가지음 碑表文 篆은 十四代孫 何哉 相稷 삼가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