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사공 휘 시보 묘

성종23년 임자년(1492) 6월 6일 신축일에 장례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 이공(李公)이 세상을 떠나니 향년 60세이었다.

 

그 아들 모등이 명년 즉 계축년(1493) 여름 4월 기유일에 장차 광주의 서쪽 태장리(廣州胎藏里) 선영하에 장사 지내려 한다고 하면서 나에게 묘갈명을 지어 달라고 청(請)하였다.

 

아! 내가 어떻게 차마 이 이공의 묘명(墓銘)을 써야 하는가?

내가 유학으로 있을 때에 공은 이미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 부인의 재종 동생이라는 인연으로 알게 되니 나를 친동기처럼 사랑하면서 내 손을 잡고 가르치고 격려하여 주던 일이 벌써 34년전 일이지만 감히 잊지를 못하면서도 어릴 때처럼 조석으로 상종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지금에 와서 이 명을 내가 어찌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공의 휘는 시보(時珤)이며 자(字)는 배가(倍價)이고, 원조(遠祖)의 휘는 도(棹)이니 고려 태조를 섬기어 공이 있어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그 후 8세에 이르러 삼파로 나누어졌는데, 끝의 선부 전서공인 휘 자화(子華)의 증손(曾孫)인 휘 정간(貞幹)은 중추원사(中樞院使)였는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머니 김씨가 100세였는데 원사(院使)께서 80이 된 나이로 어머니의 앞에서 어린아이의 어리광을 부리는 등 백방으로 즐겁게 하였으므로 세종께서 기특히 여기어 교서를 내리어 표창하였는데, 돌아가시매 시호(諡號)를 효정(孝靖)이라 하였다. 효정공이 휘(諱) 사관(士寬)을 낳으니 벼슬이 한성 부윤(漢城府尹)이었고, 부윤(府尹)께서 예장(禮長)을 낳으니 세조께서 내란(內亂)을 진정할 때에 참여한 공이 있어 두 번이나 철권(鐵券)을 내리었고, 벼슬이 병조(兵曹) 참의(參議)에 이르렀는데, 별세하니 판서(判書)를 추증하고 군(君)으로 봉작하였으며 시호(諡號)를 평간(平簡)이라 하였다. 형제 여섯 사람이 모두 잇달아 등과하였고, 재상에 이른 사람까지 있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영예롭다고 하였다. 평간공이 남양홍씨(南陽洪氏)인 중군 사정(中軍司正) 흥조(興祖)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종 계축년(1433) 10월 임신일에 공을 낳았다.

 

공이 어려서 부터 영오하여 유희하는 것까지 범상한 아이와 다르니, 평간공(平簡公)께서 특별히 사랑하였다. 차차 자라서 글을 읽음에 있어 대의를 잘 깨닫고 처리가 정민하였다. 나이 19세에 처음으로 문소전 직장(文昭殿直長)으로 제수되었으니 이때가 경태 신미년(1451 문종1) 이었다. 병자년(1456)까지 도렴서(都染書), 예빈시(禮賓寺), 선공감(繕工監)의 녹사(錄事)를 지내고 아버님 상사를 당하여 벼슬을 쉬었다가, 무인년(1458)에 사역원(司驛院) 부직장(副直長)이 되었는데, 기묘년(1459)까지 무릇 다섯번을 옮기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경진년(1460)에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를 거쳐 음죽현(陰竹縣)의 수령으로 나갔었고, 을유년(1465)에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으로 들어왔으며, 병술년(1466)에 세자익위사 좌위솔(左衛率)로 옮기었다가, 그해 겨울에 다시 군자감에 들어가 부정(副正)이 되었다.

 

을축년(1469)에 특별한 은총으로 계급이 승진되어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충무위 호군(行忠武衛護軍)이 되었다가, 신묘년(171)에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나갔고, 그해 겨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벼슬을 떠나 집에 와있었다. 갑오년(1474)에 용양위 호군(龍塗衛護軍)에 서용되었고, 을미년(1475)에 강화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병신년(1476)에 연안으로 옮기었고, 정유년(1477)에 대호군(大護軍)으로 들어왔다. 경자년(1480)에 오위장(五衛將)을 겸했고, 겨울에 첨지(僉知) 중추부사(中樞府使)에 승진되었으며, 신축년(1481)에 본직으로서 제조 단송도감(提調斷訟都監)이 되었다가, 여름에 진주 목사(晉州牧使)가 나갔으며, 을사년(1485)에 다시 첨지(僉知) 중추(中樞)로 들어왔고, 병오년(1486)에는 또 오위장(五衛將)을 겸하였으며, 정미년(1487)에는 또 여주(驪州) 목사(牧使)로 나갔다가 경술년(1490)에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들어왔다. 공은 천성이 맑고 순수하며 온화하고도 고요하였고, 겸손과 공손으로 사물에 접하며, 또 쓸데없이 노는 일이나 화려한 것등은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평소에 출입을 자주 갖지 아니하며 항상 경서나 사기를 읽는 것으로 스스로 낙을 삼았다.

 

제사는 삼가는 마음으로 받들고, 종족간에는 돈목에 힘쓰며, 비록 자제(子弟)와 같은 아랫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예의로써 대하였으며, 말소리가 맑고 깨끗하여 온후한 빛이 항상 얼굴에 감돌았다.

 

음죽현에 수령으로 있을 때에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시행되니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따랐다. 전후에 다섯 고을의 수령으로 있었지만 까다로운 절차등은 모두 간소화하여서 드러누워 있어도 행정이 잘되어 나갈만 하였다. 도량이 넓고 커서 항상 여유가 있었으니 지금까지 수령으로서 가장 훌륭하고 치적이 높은 사람 중에서 첫째로 꼽히고 있다. 그러므로 제조로서 송사를 결단할 때에나 판결사로 장례원의 일을 판결할 때에도 모두 공론에 따라서 처리하였다. 처음 판결사가 되었을 때에 대관으로서 공을 잘 알지못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이 문신이 아닌 것을 부적하다고 논박하니 왕께서 육조에 회부하여 의논하게 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이아무는 문장과 실무에 모두 능하며 일찍이 여섯군데 고을에 수령을 지냈지만 모두 치적이 두드러졌고, 또 송사를 결단하는 데에는 누구도 이간질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판결하는 직책으로 진실로 적절한 인재를 얻었다고 하였더니, 임금도 또한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공은 스스로 승진되는 것을 혐의쩍게 생각하여 장계로써 말하기를

 

『신은 본디 변변하지 못한 사람이온대 다행히 문음으로 출신하여 위계가 당상에까지 이른것은 모두 상감의 은전입니다. 그러나 판결은 중한 임무이오니 신으로서는 감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고 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요즈음의 조정의논에서 모두 말하기를 합당한 인물이라고 하였다. 내가 한사람의 말을 듣고 쓰고 아니 쓰는 것을 결정할 만큼 미혹되지는 아니하였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

 

고 하시었다.

 

직무에 취임하여서는 영민한 자질로 더구나 부지런하고 삼가서 밤낮이 없이 게을리 한 일이 없었다. 수년간을 장례원의 일을 보는 동안에 피로가 쌓여 문득 병을 얻어 위험한 고비에 이르게 되었다. 임금께서는 이 소문을 들으시고 크게 놀라시어 내의를 보내어 문병하시고, 약을 보내 주시며, 또 태의에게 명하여 곁을 떠나지 말고 병을 보살피라고 하시었다. 그 뒤 22일만에 불행히도 운명하시니

 

아! 슬픈지고.

 

부인은 이씨인데, 좌의정(左議政)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휘(諱) 원(原)의 손녀요 병조(兵曹) 판서(判書)로 추증된 휘 전의 딸이다. 아들 셋, 딸 넷을 두었으니 맏딸은 유학 김자(金磁)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를 낳았고, 다음은 유학 곽림종(郭林宗)에게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으며, 다음은 유학(幼學) 진복담(陳福聃)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고, 다음 딸은 어리며, 맏아들은 공수(公遂)이니 진사로서 유학 김항(金□)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셋을 낳았으며, 다음은 공달(公達)이니 광원군(光原君) 김백겸(金伯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둘을 낳았고, 다음은 공우(公遇)이다.

 

이어 명(銘)을 다음과 같이 엮는다.

 

전의산성 바라보니 산천 서로 어울렸네.

대대로 철인나서 왕실을 도왔구나.

위대하신 태사그늘 첨의 정승 뒤를 잇고,

중세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그 명성이 높고 길며,

효정공이 계적(繼蹟)하여 온 종족의 빛이되니,

세종께서 효성포장 독행 기리셨네.

아름답다 한성부윤 금장(金章)이 혁혁하니,

그가 낳은 여섯 아들 대과급제 연방일세.

위대할손 평간공은 빛나는 공 세웠으니

두번이나 철권(鐵券)받고 기린각(麒麟閣)에 화상있네.

판결사공 낳으셔서 선조업적 잇게 했네.

경향에 쌓인 치적 우뢰 같은 명성일세.

광천은 양양하고 광산은 드높은데

그 가운데 언덕하나 공의 묘소 여기로세.

석비에 글을 새겨 행덕을 밝히노니,

천만년 그 뒤라도 그 이름 불멸하리.

참판 이육(李陸)이 지음

 

※주(註) : 원문 서문중에 효정공을 문장공의 후손이며 문의공의 6세손이라고 한 대목이 있는데 이것은 대사간 휘 명준(命俊)의 인조(仁祖) 갑술보 서문에도 밝힌 바와 같이 여지승람(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성종 12년(1481)에 간행, 성종17년(1486)에 정정, 연산 5년(1499)에 개수(改修), 중종25년(1530)에 증보한 한국지리서에 착오 기재된 것을 인용(引用)한 것이므로 이것을 삭제하였다.> 정호(正浩)

 

 

 

成宗二十三年○歲在壬子○夏六月辛丑○掌隸院判決事○李公卒○年六十○胤子某等○以明年癸丑○夏四月己酉○將葬于廣州治之西○胎藏里先塋○求銘於余烏呼○吾尙忍銘吾李公也哉○吾之幼學也○公方筮仕于朝○以吾乃夫人堂弟○視余猶同氣○執余手敎勉○盖今三十四年○不敢忘矣○而不得朝夕相從如幼年時○以至於此銘○其可辭乎○謹按公諱時珤○字倍價○遠祖諱棹事高麗太祖有功官○至太師○其後曰混○僉議政丞號蒙菴○曰彦態政堂文學○其六世孫曰貞幹○中樞院使○性至孝○母金氏年百餘歲院使以八十之年○作兒戱於母側○以娛悅之○世宗嘉之○賜書褒美○卒諡孝靖○孝靖生諱士寬○漢城府尹○生禮長屬世祖定內難○預有功○再賜錄券○官至兵曹議○卒贈判書○封君諡平簡○公兄弟六人○皆登科○相繼宰相○時人榮之○平簡娶南陽洪氏○中軍司正興祖之女○以世宗癸丑○冬十月壬申生公○公幼而潁悟○遊戱異凡兒○平簡鍾愛之○及長○讀書知大義○處事精敏○年十九○初授文昭殿直長○是景泰紀元之辛未歲也○丙子○歷都染禮賓繕工錄事○丁父憂○戊寅除司驛院副直長○己卯○凡五遷至司憲府監察○庚辰由軍資主簿出宰陰竹○成化乙酉○召拜軍資判官○丙戌遷世子左衛率○其年冬○復○入軍資爲副正○己丑特恩陞階○以折衝行忠武衛護軍○辛卯出爲襄陽府使○冬丁母憂○甲午廻龍塗護軍○乙未出拜江華○丙申移延安○丁酉入爲大護軍○庚子兼五衛將○冬陞僉知中樞府使○辛丑以本職提調斷訟都監○夏除晉州牧使○乙巳復拜僉樞○丙午又兼五衛將○丁未又除驪州牧使○庚戌拜掌隷院判決事○公天資明粹○雅性和靜○謙恭接物○又不喜遊衍○華美等事○平居簡出入○常以經史自娛○謹祭祀睦宗族○雖子弟之卑幼○亦待之以禮○語音琅琅○溫厚之色○可燐○其爲陰竹也○威惠竝行○吏畏民懷○及爲五州○以剪煩之手○臥而治之○恢恢乎游刃有餘地○至今言字牧之賢者○推之爲第一故○提調斷訟判決掌隸○皆出公議○初拜判決○有一臺官○不知公者○以公非文臣駁啓○下政府六曹議之○皆曰李某文吏俱優○曾任六州○顯有聲績○又爲斷訟○人無間言○判決之任○誠爲得人○上亦然之○公自以嫌進啓曰○臣本無狀○幸以門蔭出身○位至堂上○皆上恩也○判決重任○臣所不敢○上曰比見朝議○僉曰允當○余不以一人言○惑於用舍○其勿更言○旣就職○以英敏之資○加以勤謹○夙夜匪懈○積數年在院○忽發疾幾危○上聞之○大驚遣內醫問疾○因賜藥餌○又命太醫不離視疾○越二十有二日○遂不幸○嗚呼痛哉○夫人李氏○左議政鐵城府院君諱原之孫○贈兵曹判書諱鐫之女○有男三人女四人○長適幼學金磁○生一女○次適幼學○郭林宗生一男○次適幼學陳福穡生二男○次幼○長曰公遂○進士○娶幼學金之女生三女○次曰公達娶光原君金伯謙之女○生二女○次曰公遇○銘曰○瞻彼全山○山川磅榮○世有哲人○以佐王室○太師始大○僉議克昌○政堂中顯○厥聲用長○孝靖遠○赫葉增光○王嘉乃孝○曰篤不忘○有美漢城○赫赫金章○曰有六子○連芳桂籍○偉矣平簡○炳炳事業○再受澯卷○圖形麟閣○生我判決○光承前烈○揚歷中外○鬱有聲績○廣川棅棅○廣山嶪嶪○中有一丘○乃公之宅○用鐫貞○用昭厥德○千載之下○有名不滅  判李陸撰

序中以孝靖公爲文莊公後文義公六世孫云云者引用輿地勝覽之錯誤也正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