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공 묘 입구

 

 

본관을 전의(全義)로 하는 이씨는 모두 고려 태사 휘 도(棹)를 시조로 모시며 그 묘소는 전의현의 서쪽 양한리 정좌언덕에 부인 합천홍씨와 합폄(合窆)되어 있다.

 

묘전에 조그마한 표석이 있는데 세운지 오래되어 깨지고 이즈러졌으니 종인이 의논하기를 존귀하신 시조의 묘전에 사척비에 이와 같이 소홀한 정기(旌記)는 너무도 초라하여 보기에 민망하니 이 어찌 후손에게 드리울 것이며 이대로 영구히 전할 수 있으리오.

 

이제라도 용모양의 개석과 거북모양의 대석(臺石)을 갖춘 신도비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나에게 명을 청하여왔다. 그러나 나 자신을 돌아보건데 학문이 천박한 후생으로서 감히 감당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공의 세대가 지금으로 부터 1000여년이 지났으니 고증할 만한 문헌이 남아있지 아니한 즉 어찌 그 일에 손댈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굳이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상고하건데, 공의 처음 휘가 치(齒)였으며 고려 태조가 백제를 치고자 군사를 거느리고 공주땅 금강에 다다랐을 때 강물이 크게 불어나 건너지 못할 새 공께서 호가(護駕)하여 무사히 건너가게 하였기에 왕께서 가상히 여겨 특별히 이름을 내리시고 그 공을 기려 거듭 작위(爵位)를 높여 익찬이등공신에 책훈(策勳)하고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봉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성종때 후손인 인(麟)이 쓴 보첩 서문에 이르기를  “고려 태조가 출병하던 초기에 공이 진중에서 군략을 바쳐서 왕의 계책을 크게 도우니 즉시 응양군 대장군(鷹揚軍大將軍)으로 발탁(拔擢)하였으며, 끝내는 왕실을 좌리(佐理)하여 삼한 통합을 이룩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그 관직을 가히 알 수 있고 후손 계맹의 묘지에 공을 가리켜 전산후(全山侯)라 하였으며 후손 발(發)의 묘비에는 공을 성절공(聖節公)이라 칭하였으니 이로써 공이 영주(領主)에 봉하여지고 증시(贈諡)되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현저한 것은 현저한 대로 전해야 하고,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데로 전해야 한다는 것은 판단을 신중히 하는 도리에 연유하는 바이므로 이제 서문에 기록하여 후일을 참고하고자 한다.

 

아들 강(康)은 대장군이고. 손자 수영(秀英)은 상서(尙書)이며, 증손 문경(文景)은 천우위 대장군(千牛衛大將軍)을 지내고. 현손 윤관(允寬)은 시랑(侍郞)이다.

 

후손 중에 두드러지게 이름난 이는 평장사(平章事) 천(仟)과 대사성공(大司成公) 자원(子), 정당문학 문의공(文義公) 언충(彦), 정승(政丞) 문장공(文莊公) 혼(混) 선부전서(選部典書) 자화(子華)이고, 문장공의 손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 익(翊)은 예안(禮安)으로 이적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벼슬이 더욱 성하였으니 황각(黃閣)으로는 영의정 정숙공(貞肅公) 탁(鐸), 우의정 효정공(孝貞公) 행원(行遠), 우의정 충정공(忠貞公) 상진(尙眞)이 있고, 의빈(儀賓)으로는 부마(駙馬) 부사 관식(寬植)이 인천옹주(仁川翁主) 곧 정종대왕 7녀에게 장가들고, 전성위(全城尉) 완(梡)은 경신옹주(敬愼翁主)에게 장가들었다.

 

공신(功臣)으로 전성군(全城君) 평간공 예장, 전성군(全城君) 양간공 서장(恕長), 전의군 장경공(莊敬公) 덕량(德良), 전산군(全山君) 양간공(良簡公) 수남(壽男), 전양군 익필(益馝)이 있고, 청백리(淸白吏)에는 충청 감사 신효(愼孝), 병조 판서 양정공(良靖公) 화(樺), 병조 참판 명준(命俊), 북병사 방좌(邦佐), 통제사 윤경(潤慶)이며, 3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분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드러난 이는 지중추원사 효정공 정간(貞幹)을 비롯하여 증 영의정 사관(士寬), 증 병조 판서 사민(士敏), 영암 군수 사혜(士惠), 문평공 계맹(繼孟), 첨정 창수(昌壽), 첨정(僉正) 사겸(思謙), 하동 현감 의장(義長), 부사(副使) 광익(光翊), 전릉군(全陵君) 순인(純仁), 이조 참판 원손(元孫), 참찬 효익공(孝翼公) 준민(俊民), 수찬 승효(承孝), 부제학 해수(海壽), 증 이조 판서 문정공(文貞公) 신의(愼儀), 증 이조 판서 충경공(忠景公) 정란(廷鸞), 도승지 의흡(宜洽), 충청도 관찰사 덕숭(德崇), 병조 판서 구령(龜齡), 전성군(全城君) 사의(思義), 판서 사례(思禮), 판사재 감사 사경(思敬), 예조 참판 함장(誠長), 이조참판 창신(昌臣), 북병사 증 영의정 제신(濟臣), 증 병조 판서 영남(英男), 증 병조 참판 용제(容濟), 증 좌승지 종문(宗文), 증 호조 참판 진병(震炳), 예조 참판 징명(徵明), 지중추 산두(山斗), 지돈령 징하(徵夏), 병조 참의 지화(之華), 대제학 문정공(文貞公) 덕수(德壽), 증 대사간 구(球), 이조 참판 이제(以濟), 좌승지 연덕(延德), 황해 감사 기경(基敬), 북병사 의익(義翼), 예조 판서 문간공(文簡公) 익회(翊會), 우회(友會), 이조 판서 효헌공(孝獻公) 호민(好敏), 예조 판서 효헌공(孝憲公) 현저(玄緖), 공조 판서 시민(時敏), 이조 판서 흥민(興敏), 이조판서 근우(根友), 이조 판서 효문공(孝文公) 근필(根弼), 예조 판서 희로(僖魯)가 있으며, 대장에 통제사에 지향(枝響), 통제사 정표(廷彪), 어영대장에 세선(世選), 통제사 창조(昌肇), 어영대장 의풍(義豊), 금위대장 방일(邦一), 어영대장 효숙공(孝肅公) 윤성(潤成), 금위대장 완식(完植), 훈련대장 응식(應植), 금위대장 정무공(貞武公) 희경(熙絅), 총융사(摠戎使) 희승(熙昇), 별영사(別營使) 교헌(敎獻)은 전의파(全義派)이고, 성균관 좨주 변(舛), 판중추 군부판서 송(鎌), 판중추 익양공(翼襄公) 천(朕), 판군기 감사(判軍器監事) 온(勉), 좌의정 정간공(貞簡公) 명(蓂), 대사헌 극순(克淳), 문정공(文正公) 간(柬), 익찬 이조 판서 유장(惟樟)은 모두 예안파이다.

 

옛 말에 이르기를 그 산을 보지말고 반드시 그 산의 나무를 보라 하였으니 고려조에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공의 혈손(血孫)들이 번성하여 대대로 아름차게 빛나 해동의 이름높은 문벌로 알려지게 되었으니 비록 공의 사적이나 행장이 자세하게 알려지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후손을 위하여 몸소 궁행(躬行)하였음이 절실 하기에 드리워진 음덕이 무궁할 것임은 이치로 보아 당연한 것이니 어찌 아름답다 아니하리요. 이어 다음과 같이 명을 엮는다.

 

하늘의 뜻을 이어 어진 군주 일어나니

호랑이 바람타듯 구름탄 용과 같이

큰 인물 어진 보필 지(智)와 능(能)을 다 바쳐서

어금니와 발톱처럼 남정(南征)길에 진군하여

금강가에 다다르니 장마물결 흉맹하여 건널길이 막혔도다.

전성(全城)에 위인있어 뱃 길 찾아 건넜으니

왕의 기쁨 한이 없어 높은 관작내리시고

새 이름도 내리시니 신도 화려할 손

큰 공(功)에 빛난 보답 더욱 더 왕실 도와

충정을 다 했으니 화상걸고 장려하여 삼한통합 이루었네.

후손이 입은 음덕 나뭇잎 푸름같이

문관 무장 재상들이 조정마다 울리었네.

높이 선 신도비에 공의 업적 새겼으니

무궁한 앞 날까지 추모하고 본 받으리.

 

통정대부 비서원 승지 안동 김영한(金寗漢) 지음

27代孫  정렬(貞烈) 씀

단기 4281년 무자 10월    일 비를 세우다

 

구비(舊碑)를 세운 지 이미 46년이 경과 되었다. 비체(碑體)가 넉넉지 못하고 또한 비문에 약간의 흠이 있어서 두렵게 장고(長考)한 끝에 종의를 거쳐 잘못을 고치고 다시 중수키로 하고 원문을 척본하여 확대 중각하여 큰 비석을 세우니 백세토록 장구할 지어다. 계유(1993) 3월 3일 본종 화수회가 삼가 세우다.

29대손 이사장 종관(鍾寬)은 경서하다.

 

 

 

李氏之貫全義禮安者○皆以高麗太師諱棹爲始祖其塚宅○在全義縣西良閒里負丁之原○而夫人川洪氏蟄焉○墓前有短表○歲久漫麒○擧宗相與議曰○以若始祖之尊○四尺之封○旌記疎略○巳不稱於觀瞻○何以廢諸苗裔垂之悠久乎○乃備栗龜之儀○樹之神道○問銘於寗也○自顧晩生淺學○不敢當者○且公之世○今爲千有餘載○文獻放佚○其何以下手乎○固辭不獲則○按輿地書○公初諱齒○麗太祖南征百濟○至公州之錦江○江水大漲○公護駕利涉王嘉之○特賜名而表功○仍賜爵翊贊二等功臣三重大匡太師○其策功封爵於斯可知矣○我成宗時後孫麟之序譜首曰○麗祖起兵之初○公獻策馬首○允協睿謀○卽加鷹揚大將軍○遂佐理王室○統合三韓○其官職可知也○後孫繼孟墓誌○稱公全山侯○後孫發墓碑○稱公聖節公封侯○贈諡亦可知也○然著而傳著○疑而傳疑○由於審愼之道故○今姑竝序之○以備考云○男康○大將軍○孫秀英○尙書○曾孫○文景○千牛衛大將軍○玄孫允寬○侍郞○後裔之通顯者曰○平章事仟○大司成子峰○政堂文學文義公彦態○政丞文莊公混○選部典書子華○文莊公之孫寶文提學翊○移籍禮安○入本朝○官業益盛領議政貞肅公鐸○右議政孝貞公行遠○右議政忠貞公尙眞○府使寬植○尙仁川翁主○全城尉梡○尙敬愼翁主○功臣則○全城君平簡公禮長○全成君襄簡公恕長○全義君莊敬公德良○全山君良簡公壽男○全陽君益馝○選淸白則○忠淸監司愼孝○兵曹判書良靖公樺○兵曹判命俊○北兵使邦佐○統制使潤慶○三品以上指不勝屈○而擧其最著則○知中樞孝靖公貞幹○贈領議政士寬○贈兵判士敏○靈巖郡事士惠○文平公繼孟○僉正昌壽○僉正思謙○河東府使義長○副使光翊○全陵君純仁○吏曹判元孫○贊孝翼公俊民○修撰承孝○副提學海壽○贈吏曹判書文貞公愼儀○贈吏曹判書忠景公廷鸞○都承旨宜洽○忠淸觀察使德崇○兵曹判書龜齡○全城君思義判書思禮○判司宰監事思敬○禮曹判誠長○吏曹判昌臣○北兵使贈議政○濟臣○贈兵曹判書英男○贈兵曹判容濟○贈左承旨宗文○贈戶震炳○禮曹判徵明○知中樞山斗○知敦寧徵夏○兵曹議之華○大提學文貞公德壽○贈大司諫球吏曺判以濟左承旨延德○黃海監司基敬○北兵使義翼○禮曹判書文簡公翊會○贈左承旨友會○吏曹判書孝獻公好敏○禮曹判書孝憲公玄緖○工曹判書時敏○吏曹判書興敏○吏曹判書根友○吏曹判書孝文公根弼○禮曹判書僖魯○戎垣則○統制使枝馨○統制使廷彪○御營大將世選○統制使昌肇○御營大將義角○禁衛大將邦一○御營大將孝肅公潤成○禁衛大將完植○訓鍊大將應植○禁衛大將貞武公熙絅○總戎使熙昇○別營使敎獻○此全義之派也○成均祭酒舛○判中樞鎌○判中樞翼襄公朕○軍器監事勉○左議政貞簡公蓂○大司憲克淳○贈吏曹判書文正公柬○翊贊吏曹判書惟樟○此禮安之派也○古語曰不見○其山○必觀其木○自麗洛鮮○公之血胤○蕃衍奕毁○稱左海名閥○公之事行○雖未詳然其領躬燾後○餘蔭無窮者○其理固然○烏櫃休哉○銘曰○天造草昧○眞主方興虎嘯風烈○龍飛雲蒸○碩輔良弼○竭智盡能○爲爪爲牙○爲股爲肱出師南來○錦江之邂○洪濤壯猛○難通尺咫○全城偉人○有舟斯艤○鳳駕旣濟○宸心飢喜○族以好爵○錫以嘉名○粉鈑赤○毁○赫赫尊榮○乃心王室○彌篤忠貞○贊畵密勿○鴻業竟成○勳蔭垂後○柯葉蕃殖○文武卿相○煥顯一國○蒼珉屹屹○大書深勒○永永年代○庸備典式

檀紀四千二百八十一年 戊子十月  日立

通政大夫○秘書院承旨○安東金寗漢撰

二十七代孫○嘉善大夫○侍講院○輔德○原任○奎章閣直學士○貞烈書

 

舊碑立後○己經四十六年矣○碑體不富○其於有欠故○脂念之餘○宗議相協○剔訛改修○而原文拓本○擴大重刻○以樹角碑○庶幾百世之○長歲癸酉○三月三日○本宗花樹會○謹竪

二十九代孫○理事長 鍾寬○敬書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유천리 산3-1

 

묘 충남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 산3번지의1 정좌원(丁坐原) 중종임진(1532)에 15대손 구령(龜齡)이 충청감사때 갈석을 세웠으나 연구年久하여 훼손되니 선조무인(1578)에 15대손 의인(依仁)이 전의현(全義縣) 현감(縣監)때 다시 갈석(碣石)을 세웠으나 이 또한 연구(年久)하여 음각(陰刻)이 모손(耗損)되니 숙종정해(1707)에 22대손 홍조(弘肇)가 충청병사(忠淸兵使)때 또 다시 비석을 세움으로 두 개의 비(碑)가 있고 그후 25대손 익민(益敏)이 모금하여 상석(床石)을 바꿔 세웠다. 광복(光復)후 무자(1948)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니 안동인(安東人) 승지(承旨) 김영한(金寗漢)이 비문(碑文)을 지었고 후손 정열(貞烈)이 쓰다. 경오(1930)에 비문중(碑文中) 오류(誤謬)를 정정訂正하여 새로 다시 세우다. 계축(1973)에 후손 희원(熙元)과 준이 상석(床石)과 봉석(封石)을 보완(補完)하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전의현(全義縣)에 있는 이성(李城)이[여조태사(麗朝太師)] 이도(李棹) 소거지(所居趾)라 하였고 이성(李城)은 무진(1988)12월 충청남도(忠淸南道)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제77호(號)로 지정(指定)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