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구직(丘直)이요 본관은 전의현이고 원조(遠祖)는 태사공 휘 도(棹)이니 고려 태조를 도와서 삼한공신으로 봉작되었으며, 증조의 휘는 천(仟)이니 응양 대장군이고, 조 의 휘 는 자화(子華)이니 선부 전서(選部典書)이었다. 고의 휘는 득영(得榮)이니 전법(典法) 좌랑(佐郞)이고, 비는 유씨(柳氏)이니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감찰대부(監察大夫) 정(靖)의 딸이다.

 

지원 기묘년(1339)2월 28일에 공이 태어나서 지정 임진년(1352)에 문음(門蔭)으로 비로소 숭복도감(崇福都監) 녹사(錄事)가 되었다. 그 후 산원으로 중랑장 벼슬까지하였고, 홍무 병진년(1376)에 봉선대부 서운전 부사(書雲殿副使)에 제수되었으며, 경신년(1380)에 봉상대부 개성 소윤을 지냈고, 신유년(1381)에 중랑장으로 전현정(典賢正)을 겸하였고, 임술년(1832)에는 선공령(繕工令)으로 계급은 중정대부(中正大夫)이었다.

 

얼마 뒤에 사복시 정으로서 교주도 안렴사(按廉使)가 되었고, 계해년(1383)에 내직으로 지전법사(知典法事)가 되었고, 갑자년(1384)에 삼사 좌윤(三司左尹)으로 옮기어 계급은 봉순대부(奉順大夫)였다. 무진년(1388)에 통인대부(通寅大夫) 판선공(判繕工)이 되었고, 기사년(1389)에 봉익대부(奉翊大夫) 형조 판서가 되었다. 조선조 태조가 즉위하여 공에게 원종공신(原從功臣) 호를 주었고, 계유년(1389)에 가선대부 호조 전서로 승진되었다가 외직으로 공주 목사로 나갔고, 다음해인 갑술년(1394) 12월 초7일에 병으로 별세하여 풍덕군 흥천리(豊德郡興天里)에 장사 지내었다. 공이 판전교시사 낙안김공(樂安金公) 인관(仁琯)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다.

 

아들로서 맏이는 정간(貞幹)이니 중추원사로서 효행이 있어 임금께서 이를 아름답게 여기어 가선대부 도관찰사(都觀察使)의 전직에서 자헌대부(資憲大夫) 중추원사로 발탁하였고, 인하여 궤장(杖)을 주었으며, 공을 의정부(議政府) 참찬(淙贊)으로 증직하고, 김씨는 정대부인(貞大夫人)으로 봉하였다. 중추공은 순평군(順平君) 문달한(文達漢)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3녀를 낳았다. 맏이는 사흠(士欽)이니 대장군을 지냈고, 다음은 사관(士寬)이니 한성(漢城) 부윤(府尹)을 지냈으며, 다음은 사신(士信)이니 첨지 중추원사를 지냈고, 다음은 사민(士敏)이니 철원 도호부사를 지냈으며, 다음은 사혜(士惠)이니 영암 군수를 지냈다. 맏딸은 예문관 대제학 허성(許誠)에게, 다음은 산원(散員) 김효성(金孝誠)에게, 다음은 김제 군수 허비(許扉)에게 각각 출가(出嫁)하였다. 둘째 아들은 서령(署令) 진간(珍幹)이니, 대부 손용(孫湧)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우번(于蕃)이니 사정(司正)이요, 맏딸은 교하 현감 박도(朴禱)에게, 다음은 사온(司覓) 직장(直長) 이기덕(李耆德)에게, 다음은 군자(軍資) 부정(副正) 민창손(閔昌孫)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셋째아들은 내섬소윤 양간(良幹)이니, 초취는 밀직(密直) 부사(副使) 문경공(文敬公) 이강(李岡)의 딸로서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부사직(副司直) 지하(之厦)요, 딸은 임천(林川) 군사(郡事) 안상진(安尙鎭)에게 시집갔고 후취는 검한성(檢漢城) 신광신(申光臣)의 딸로서 1남 1녀를 낳았는데, 이하(季厦)는 아직 어리고, 딸은 유학(幼學) 김추(金錘)에게 출가하였다. 넷째아들은 부정(副正) 문간(文幹)이니, 초취는 밀직 부사 최을의(崔乙義)의 딸로서 딸 셋을 낳았다. 맏딸은 호조 판서 남지z(南智)에게, 둘째는 도염(都染) 부승(副丞) 김신지(金愼智)에게, 셋째는 광흥창(廣興倉) 부승(副丞) 신계성(申繼性)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후취는 지주사(知州事) 김보린(金保麟)의 딸로서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부사정(副司正) 계손(季孫)이고, 딸은 유학 민처령(閔處寧)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맏딸은 집의(執義) 권엄(權嚴)에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호조 정랑 권심(權審)이고, 둘째딸은 봉상 소경(奉常少卿) 곽순(郭恂)에게 시집가서 4남1녀를 낳으니 맏아들은 내섬(內贍) 직장(直長) 서(曙)이고, 둘째 아들은 부사정(副司正) 비(庇)이며, 셋째 아들은 별시위(別侍衛) 휴(讀)이고, 막내 아들은 유학 용(庸)이며, 딸은 형조 참판 윤형(尹炯)에게 출가하였다. 셋째 딸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이맹균(李孟畇)에게 시집갔는데 무후하여 그 동생을 맹진(孟畛)의 아들 보기(保基)로 후사를 삼았다. 부인께서는 공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48년만인 세종 23년 신유년(1441) 12월 30일에 세상을 떠나시니 나이가 100세(102세는 근거가 없음)이고 내외 증손이 남녀 모두 120여인이고, 현손 남녀 모두 90여인이었는데 이들을 부인께서 모두 직접보시었다. 공의 자손은 대략 오른쪽에 기록한 것과 같다.

정통 9년(1444) 세종26년 28일 아들 내섬 소윤 양간(良幹)이 지음

 

 

 

公諱丘直○貫全義縣○遠祖太師○諱棹○相高麗太祖○三韓功臣○曾祖諱仟○鷹揚大將軍○祖諱子華○選部典書○考諱得榮○典法佐郞○騙柳氏籍文化○監察大夫諱靖之女○至元己卯二月二十八日公生○至正壬辰○公以門蔭○始授崇福都監錄事○厥後自散員至中郞將○至洪武丙辰○拜奉善書雲副使○庚申奉常開城少尹○辛酉加中郞典賢正○壬戌繕工令○階中正○俄遷司僕正○爲交州道按廉○癸亥召爲至典法事○甲子移三司左尹○階奉順○戊辰通憲判繕工○己巳奉翊○刑曹判書○壬申我太祖卽位○賜公原從功臣○癸酉陞嘉善○戶曹典書○出爲公州牧使○越明年○甲戌十二月初七日病卒○葬于角德郡○興天里○公娶判典校寺事○樂安金公仁琯之女○生四男三女○男長貞幹中樞院事○有孝行○上嘉之○以前嘉善都觀察使○擢資憲中樞院事○仍賜免杖○贈公爲議政府贊○封金氏貞大夫人○中樞娶順平君文達漢之女○生五男三女○長士欽○大護軍○次士寬○漢城府尹○次士信○僉知中樞院事○次士敏○鐵原都護府使○次士惠○靈巖郡守○女長適藝文館大提學許誠○次適散員金季誠○次適金堤郡事許扉○二男署令珍幹○娶大夫孫湧之女○生一男三女○男于蕃司正○女長○適交河縣監朴禱○次適司覓直長金耆德○次適軍資副正閔昌孫○三男○內贍少尹良幹○先娶密直副使文敬公李岡之女○生一男二女○男副司直之厦○女適林川郡事安尙縝○後娶檢漢城申光臣之女○生一男一女○季厦幼○女適幼學金錘○四男○副正文幹○先娶密直副使崔乙義之女○生三女長適戶曹判書南智○次適都染副丞金愼智○次適廣興倉副丞申繼性○後娶知州事金保麟之女○生一男一女○男副司正季孫○女適幼學閔處榮○女長適執義權嚴○生一男○戶曹正郞審二女適奉常少卿郭恂生四男一女○男長內贍直長曙○次副司正庇○次別侍衛讀○次幼學庸○女適刑曹判尹炯○三女適議政府左贊成李孟畇○無後○以同生弟孟畛之子保基爲后○夫人後公四十八年辛酉十二月三十日卒○壽百二歲○內外曾孫○男女共百二十餘人○玄孫男女共九十餘人○皆夫人眼前所見也○正統九年二月日○子內贍少尹良幹撰○公世系子孫大略如右錄○正統九年二月日○子內瞻少尹良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