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역 전경

 

동양위1)신익성 지음

나의 돌아가신 외조부인 청강선생은 비조(鼻祖)2)이신 태사(太師) 도(棹) 이후 칠백년만에 태어나시었다. 효정공(孝靖公)의 창성하던 나머지 기운을 어어받아 본조의 명신이 되었다. 성은 이씨고, 휘는 제신(濟臣)이며, 자는 몽은(夢應)이고, 청강은 곧 그의 호이며 전의(全義)사람이다. 효정공 휘 정간(貞幹)은 백세되신 어머니를 잘 봉양하여 세종대왕이 그를 포상하여 가상하게 여겼으며, 마침내 동방의 아름다운 일이 되었다. 그는 공의 6대조가 된다. 휘 공달(公達)은 양주(楊州)목사로 공의 조부이다. 아버지는 문성(文誠)으로 절도사를 지냈고, 어머니는 부령(富寧)부사 우예손(禹禮孫)의 딸이다.

 

선정(先正)3) 정암(靜菴) 조광조9趙光祖)가「그대는 공자의 문하에 있었더라면 그 제자들에게 뒤지지 않겠다」고 칭찬하였다. 대대로 내려오는 덕이 쌓이어 가정(嘉靖) 병신(1536) 7월24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대과에 급제하고 사관을 거쳤다. 임금께 직도로 간하였으나 용납되지 않아 지방 수으로 여러 번 나갔다. 선조께서 산반(散班)4)으로 있는 그를 강계(江界)부사에 발탁하고, 북방을 방비하게 하였다. 다음에는 다시 함경도의 절도사를 맡기었는데, 이 때 변방의 오랑캐가 뜻밖에 변란을 일으켜 경원진(慶源鎭)을 잃었다.

 

그러나 공이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여 적의 소굴을 소탕함으로써 나라의 위신을 펼 수 있었다. 선묘가 공의 공적을 알고 죄를 묻지 않으려 하였으나, 그 가운데 공을 미워하는자가 말하여 끝내 서쪽으로 귀양가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는 곧 만력(萬曆) 계미년(1583) 10월 6일이다. 둘째아들 수준(壽俊)이 관을 모시고 돌아와서 갑신년(1584) 4월 모갑(某甲)에 양근군 서종면(西終面) 수회리 갑좌원(甲坐原)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정경부인을 추증한 상씨(尙氏)로 영의정인 성안공(成安公) 진(震)의 손녀요, 선무랑(宣務郞) 붕남(鵬南)의 딸이다. 가정의 규범을 잘 닦아서 아름다운 이름이 있었다. 가정 무술년(1538) 12월초8일에 태어나서 15세에 공에게 시집왔다. 공보다 11년 뒤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때는 만력 계사년(1593) 3월 15일이다. 8월 모갑(某甲)에 공의 묘에 부장하였으나 묘자리가 불길하다고 해서 모산(某山)에 그대로 두고 좌향만 바꾸어 간좌(艮坐)를 잡아 만력 을묘(1615)년 12월 모갑(某甲)에 이장하였다. 4남2녀를 낳았으니, 기준(耆俊)은 문과급제하여 승문정자(承文正字)를 지냈고, 수준壽俊은 문과급제하여 부사(府使)이고, 구준(耉俊)은 도사(都事)이며, 명준命俊은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참판을 지냈다. 맏딸은 도정(都正) 민유경(閔有慶)에게 시집갔고, 둘째딸은 영의정인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에게 시집갔다. 내 외의 증손(曾孫), 현손(玄孫)5)이 200여인이다.  공의 충효와 문장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집에 있을 때나 조정에 있을 때의 행적은 비지(碑誌)가운데 있으니, 그 중 중요한 일만을 들어 표한다. 아! 공의 손자되는 석기(碩基)가 능히 추원의 뜻으로 선조의 뜻을 이루어 다스리니, 이는 가히 선조의 아름다운 뜻을 바꾸지 않는 것이라 할만하다.

 

 

<註>


1) 신익성(申翊聖) : (1588) 선조21-(1684)인조22, 선조의 사위 척화오신(斥和五臣)의 한사람.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 영의정 (흠欽)의 아들.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짐. 청강의 외손자

2) 비조(鼻祖) : 시조(始祖). 사람이 배태될 때 코의 모양이 먼저 생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조를 비조라 했다.

3) 선정(先正) : 선철(先哲), 선현(先賢), 옛날의 현철한 사람.

4) 산반(散班) : 일정한 반열이 없음. 산관이라고 한다.

※산관(散官) : 일정한 관직이 없고 관계(官階)만을 보유하는 관원. 일명 산계(散階) 또는 산직(散職).

5) 현손(玄孫) : 증손의 아들, 오대손(五代孫).

 

東陽尉 申翊聖 撰

惟我外王父○淸江先生○後鼻祖太師棹○七百○紹承孝靖公○得全昌之餘○爲本朝名臣○姓李氏○諱濟臣字夢應○淸江卽其號○全義人也○孝靖公諱貞幹○善養百歲母○世宗大王褒嘉之○遂爲東方勝事○於公爲六代祖○諱公達楊州牧使○寔公祖也○考曰文誠○節度使○騙富寧府使禹禮孫女○先正趙靜菴光祖○所稱子讓雖在孔門○不讓諸子者也○胚胎世德○以嘉靖丙申七月二十四日生○早擢巍科○歷太史給諫○直道不容○多以墨綬苞外○受知宣廟○以散班○擢江界府使○用最○彭漏北鄙○時藩胡之變○生於不虞○慶源鎭失守○公能策勵諸將○焚轍賊窟○以伸國威○宣廟○知公功不欲罪中○勣疾者言○竟西遷以卒○卽萬曆癸未十月初六日也○次子壽俊○扶匍而返○以甲申四月某甲○葬于楊根郡○西終面水回里○甲坐原○配曰贈貞敬夫人尙氏○領議政成安公震孫○宣務郞鵬南女○克修虜範○令聞穆如○生嘉靖戊戌十二月初八日○十五歸公○後公十一年卒○萬曆癸巳三月十五日也○八月某甲○蟄葬公塋○以宅兆不吉○仍某山○而卜負艮地○用萬曆乙卯十二月某甲○移慄焉○生四男二女○曰耆俊文科承文正字○曰壽俊文科府使○曰耉俊都事○曰命俊文科壯元判○女長適都正閔有慶○次適領議政文貞公申欽○內外曾玄孫二百餘人○公之忠孝文章○臣人耳目○而居家立朝事○行○在碑誌中○据其大者○以表○噫孫碩基○能追遠○而成先志克治○其可謂不替先懿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