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수재 - 청강공 재실 전경

 

중종 31년 丙申(1536) 7월 24일 丁丑(午時)에 선생은 서울 청파 반석방(盤石坊: 현서울 서부역 남북축선부터 만리동 고갯마루까지의 행정구 이름) 집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우씨(禹氏)가 일찍이 선생을 잉태하고 있을 때 꿈에 학 한마리가 품속으로  들어오더니, 잠이 깨어 이에 선생을 낳았다. 인하여 그것으로 어릴 때의 자(字)를 삼았다.

 

32년 丁酉(1537년), 선생 2세

33년 戊戌(1538년), 선생 3세

34년 己亥(1539년), 선생 4세

 

35년 庚子(1540년), 선생 5세, 능히 글을 배웠는데, 과정(課程)을 기다리지 않고 부지런히 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36년 辛丑(1541년), 선생 6세

 

37년 壬寅(1542년), 선생 7세

상국(相國)  성세창(成世昌)이 선생의 조부인 참판공(參判公)이 계신 곳을 방문 하였는데, 선생을 불러 무릎에 앉히고 연구(聯句)를 짓게 했더니 즉시 응하여「새가 날아 저 푸른 하늘로 떠오르니, 푸른 하늘의 높 낮이를 알겠구나」(鳥飛靑天浮 靑天高下知)하였다. 상국이 감탄하고 칭찬하기를 마지 않으며 「이 아이는 훗날 반드시 노부(老父)의 일을 잇겠군요」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무릎에서 내려와 엎드려 한참동안 겸양하였다. 상국이 더욱 기특하게 하였다.

 

39년 癸卯(1543년), 선생 8세, 참판공이 세상을 떠났다. 그 때 절도공(節度公)은 변군(邊郡)에 있었으므로 선생이 어린 아이로 혼자 상례를 주관하고 다스리는 것이 모두 조리가 있었고, 곡하고 제사를 차리는 것이 법도와 의례를 한결같이 지켜서 온 집안이 그를 칭찬하였다.

 

39년 甲辰(1544년), 선생 9세

 

인종 원년(元年) 乙巳(1545년), 선생 10세

절도공이 창원(昌原)에 벼슬하러 나갈 때 선생이 모시고 갔다. 지나는 길에 물 한줄기, 바위 하나에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자취가 있는 것을 보면, 문득 발을 멈추고 읊조리고 완상하며 돌아왔다.

 

하루는 감사(監司)가 부(府)에 들어왔는데 의위(儀衛)가 몹시 성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구경하였으나, 선생이 홀로 즐겨 보려하지 않고 말하기를「내 어찌 이런 부당한 일을 하겠는가?」하니 사람들이 더욱 그 뜻이 높음을 알았다.

 

이후로 공부에 전념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절도공이, 선생이 지나치게 공부에 빠져서 병이 될까 염려하여 밤이면 안팎에 모두 불을 끄도록 하였다. 선생은 반드시 절도공이 잠든 것을 엿보아 스스로 불을 켜고 외며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남명(南冥) 조(曺)선생이 선생을 한번 보고는 기특하게 여겨 마침내 좌우에 차고 있던 경의(敬意), 뇌천(雷川) 두 패(牌)를 끌러서 선생에게 차게 하고 장차 원대하게 될 것을 깊이 기대하였다.

 

명종원년 丙午(1546년), 선생11세

2년 丁未(1547년), 선생12세

 

3년 戊申(1548년), 선생13세

향위(鄕圍) 진사 초시에 뽑혔으나, 절도공이 그 빠름을 염려하여 주사(主司)에게 그 이름을 빼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선생의 소문이 더욱 성하였고, 더불어 사귀는 사람들에 문인, 장자(長者)가 많았다.

 

4년 己酉(1549년), 선생 14세

5년 庚戌(1550년), 선생 15세

 

6년 辛亥(1551년). 선생 16세

고재설(顧齋說)을 지었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재(齋) 위에 어째서 고(顧)를 썼을까? 그 고(顧) 자에 깊은 뜻이 있기에 이름지은 것이다. 깊은 뜻을 어찌하여 고(顧)로 표현하였을까? 밝은 덕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대학으로 들어가는 첫째 문이 명덕이니, 명덕이야말로 가장 큰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 이 자체가 덕을 밝히는 방법이다. 이런 까닭에 「돌아본다」하는 것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고, 밝은 명령이 곧 덕을 밝히는 것이다.「고(顧)자를 풀이한 논설에 이르기를 정상적인 덕목(德目)이 바로 「덕을 밝힌다.」하는데 있는 즉, 숨쉬고, 밥 먹고 하는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덕을 밝히는」데에 단절하는 시간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거기에 뜻을 두고 살아 나가며, 정말로 그 「사북」을 얻는다면, 자신이 이 덕목을 실행 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자세로 시작하여야 할 것인가? 어허 주자께서 말씀하신 이른바「하늘의 밝음」이 나에게 덕을 실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중용에서 말한 천명(天命)의 성이 아니겠는가? 천성의 「밝음」이 다섯이 있는데, 일상생활이 이 다섯 가지 성명(性明)에서 벗어남이 없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물질과 맞서기 전에는 이 마음이 맑고 밝아서 조금도 어두운 구석이 없다가, 물질의 유혹을 받으면, 사심이 그 사이에 끼이어 들어 어둠이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는 일이 많은 법이다. 그러므로 때때로 자신을 돌아보아 반성하라. 부자 사이에는 어짐을, 군신 사이에는 의로움을, 이 이론을 형제간, 부부간, 붕우간으로 확대시키어 그 이치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가지 일, 한 가지 물건, 한 가지 움직임과 정지함, 한번 말함과 침묵... 등을 모두 이 논리에 합치시킨다면, 「돌아봄」의 책임은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덕을 밝히는 도(道) 역시 다하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돌아봄」의 보람이 가장 끽긴한 것이 아니겠는가? 능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배워야 할 것이다. 이미 이에 깊은 뜻을 부여하여 이름 지었다면 어찌 그 뜻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허! 자신을 반성한다는 정신적 자세여.

 

7년 壬子(1552년), 선생17세

조용문(趙龍門) 욱(昱)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학업이 날로 나아갔다. 용문의 자는 경양(景陽)으로 평양인니다. 나이 19세에 양방(兩榜) 진사가 되었으나 개연히 도(道)를 구하는 뜻이 있어 맏형인 양심당(養心堂) 성(晟)과 함께 조 정암 김 정 등을 쫓아 정암의 용인 별서(別墅)에서 공부하고 독서하였다. 북문의 화가 일어남에 미처 함께 계류되었으나 풀려 났다. 그 이후로 세상일에 뜻을 버리고 용문산에 은거하면서「깊은」뜻을 구하였다. 형제가 사이좋게 학업을 갈고 닦으니 세상에서 그들을 하남(河南)의 형제(伯叔)라고 칭하였다. 그 때 선생이 그(용문)의 문하에 나아가 학업을 배우니, 용문이 자주 칭찬하여 말하기를 천리마의 뛰어남을 어찌 왕량의 채찍질을 기다려서야 알겠는가 하였다. 박 계현(朴繼賢), 이 사성(李師聖) 심 수경(沈守慶), 진 욱(陳旭), 신 공유(愼公有)는 모두 동문 친구들이다. 이 해에 상 성안공(尙成安公)의 집에 장가들었는데, 성안공이 늘 큰 그릇이라고 선생을 칭찬하였다.

 

8년 癸丑(1553년), 선생 18세

월천(月川) 이 정암(李廷馣)과 상 성안공의 문하에서 교분을 맺었다. 월천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몽응은 늘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운 군자다. 사람들과 사귈 때 의기가 합하면 손을 잡고 졸아하면서 간이라도 빼줄 듯하고, 만약 (다른 사람이) 욕심이 많아 마음이 흐리고, 간사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아무리 높고 중요한 지위에 있다하더라도 반드시 침을 뱉으며 비루하게 여긴다.」하였다.

 

9년 甲寅(1554년), 선생 19세

시경을 읽다가 구역(九罭)편에 이르러, 성인이 변고(變故)에 처하여도 그 떳떳함을 잃지 않는 것에 깊이 감동하여 오언시를 지었다.

 

10년 乙卯(1555년), 선생 20세

10월에 큰아들 기준(耆俊)이 서울 집에서 태어났다.

 

11년 丙辰(1556년), 선생 21세

한성시(漢城試)에 책문(策文)을 써서 뽑혔다.

 

12년 丁已(1557년), 선생 22세

청강거사대(淸江居士對)를 쓰다.

 

13년 戊午(1558년), 선생 23세

봄에 사마시(司馬試)에 뽑혔다.

 

14년 己未(1559년), 선생 24세

11월 15일에 둘째 아들 수준(壽俊)이 서울 집에서 태어났다.

 

15년 庚申(1560년), 선생 25년

조 남명(식)의 문하에서 학업을 배우다.

 

16년 辛酉(1561년), 선생 26세

 

17년 壬戌(1562년), 선생 27세

10월에 조 극기 감(堪)을 전송하는 글(送趙克己序)을 쓰다.

 

19년 甲子(1564년), 선생 29세

가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보임되었다.

 

20년 乙丑(1565년), 선생 30세

예에 의해 부정자(副正字)에 천거되고 홍문관록(弘文館錄)에 뽑혔다.

임금이 양화당(養和堂)에 나와서 문신 중에서 무릇 홍문관록에 뽑힌 사람들에게 어제(御題)를 가지고 근체시(近體詩) 다섯 수를 지어 바치게 했는데, 선생의 지은 것이 모두 일등을 했다. 임금이 많은 상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21년 丙寅(1566년), 선생 31세

봄에 예문관(藝文館)에 뽑혀 들어가 검열 대교 봉교(檢閱待敎奉敎) 겸 춘추관 기주관 (春秋館記注官)이 되었다. 사국(史局)에 있을 때, 일시의 사적을 숨김없이 직필하고, 후진 선비들을 천거해서 나아가게 함에는 공평한 의논을 따르고자 하고, 전전긍긍하며 아첨하지 않으니,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가 많아서 명도(名途)에서 어그러져 세력을 얻지 못함이 대게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해에 조 남명이 사직을 당하게 되었다. 남명이 올린 소(疏)에 「중전 께서는 생각이 깊고 성실하시기는 하나 깊은 궁궐 안에 있는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께서는 어리시니 선왕(先王)의 한 외로운 후사에 불과합니다. 많고 많은 천재지변과 억만갈래의 인심을 어찌 감당 하리오」라는 말이 있었는데 명묘(明廟)가 과부 두 글자가 불손하다고 해서 진노하고 그를 벌하려 하였다. 선생이 이때 우사(右史)로 입시해 있었는데, 좌상(左相)인 상공(尙公) 진(震)이 선생으로 하여금 송사(宋史) 영종기(英宗紀)에서 구양수가 자성(慈聖)에게 고한 「태후는 깊은 궁궐 안에 있는 일개 부인이요, 신(臣) 등은 오, 륙서생」이라는 말을 찾아내게 하고 「마땅히 이것으로 임금님의 진노를 풀도록 하라」고 하였다. 다음날 궐에 나아가 계(啓) 하기를 「조 식의 소는 오로지 고인(古人)을 답습하여 임금님께 아뢴 것으로 나라의 위태로운 형세를 극진히 말한 것이지 방자한 말이 아닙니다」하니 임금이 마침내 불문에 부쳤다.

 

22년 丁卯(1567년), 선생 32세

 

선조 원년 戊辰(1568년), 선생 33세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형조, 공조, 호조 3조의 좌랑(左郞),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고, 겨울에 병조좌랑 겸 기주관으로 천거되어 들어가 명묘실록을 편찬하였다. 본조(本曹)에 있을 때 번거로움을 없애고 간사한 일을 적발해 내니 그 명성이 여러 낭관(郎官)들 위에 있었다. 그 때 판서 오 상(吳祥)이 선생의 하는 일을 보고 말하기를 「앞으로 큰일을 맡길만한 사람은 반드시 몽응이다」하고 마침내 서로 마음이 맞아 몹시 기뻐하였다.

 

이 해에 명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 선생이 율곡, 월정, 동강(東崗) 등과 더불어 제술관(製述官)에 뽑히니 모두 당시의 최고로서 선발된 것이다.

 

2년 己已(1569년), 선생 34세

봄에 우계(牛溪), 율곡 제현(諸賢)과 더불어 퇴계, 남명을 배행하여 박 자의(朴諮議) 의 호유 북원(湖臾北園) 생일잔치를 축하하러 갔다. 그 때 주고받은 시첩(詩帖)이 있다.

 

셋째 아들 구준(耈俊)이 태어났다. 그 때, 율곡이 위사위훈(衛社僞勳)을 삭탈하여 국시(國是)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여러 번 계(啓)를 올렸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이 상소하여「을사(乙巳)의 변란이 이윤(二尹)이 서로 반목함에서 비롯되어 화(禍)를 즐기는 자들이 여기에 편승하고, 원수를 갚으려는 자들이 여기에 있으며, 이로움을  꾀하는 자들도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 죄를 꾸며대서 법망에 끌어넣는 일이 이처럼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로 미루어 그 일을 생각하신다면, 절로 노여움이 생겨나 여러 흉악한 자들을 사로잡아 와서 일일이 그 죄를 따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하였다.

 

가을에 감찰 겸 동지서장관(冬至書狀官)으로 중국에 조공하러 갔다. 그 때 홍려시(鴻臚寺)가 함께 간 사신들을 막고 내몰아서 조선 사신들이 본래 서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했다. 선생이 제독(提督) 왕주사(王主事)에게 글을 올려보내 예(禮)에 의거하여 변론하니 그 말이 매우 명쾌하고 정확하였다. 이에 선조(先朝)에 정해진 오랜 규범을 되찾게 되고, 이후로 하사(賀使)들이 설 자리를 잃고 모욕을 당하는 폐단이 없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영평부(永平府)에 이르러 백이숙제의 사당에 배알하였는데, 그때 쓴 시가 있다.

 

3년 庚午(1570년), 선생 35세

여름에 병으로 체직(遞職)되어 성균관 학관(學官)이 되었다가 곧 예조정랑 지제 교(知製敎) 겸 춘추관 기주관이 되었다. 가을에 울산군의 군수자리가 비니,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울산군에는 토호(土豪)가 많아서 다스리기 어려우니 모름지기 재주와 명망이 있는 문신을 보내야 한다고 하여 세 번이나 바꾼 다음에야 적임자를 보냈다.

 

선생이 부임해 간 뒤 법을 세우고 기한을 정해 미납한 조세를 걷어들이게 호령하였다. 백성들이 칠만 여석을 가져오는데 혹시 뒤에 쳐질까 걱정하여 한 달도 되기 전에 곡식을 거둬들이는(세금을 걷는) 것이 완료되었다. 한 토호가 일찍이 자신의 권세를 믿고 꾸어 쓴 돈을 멋대로 갚지 않으려 하였으나 공이 부임한 것을 듣고 독촉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갚았다. 백성 중에 재산을 가지고 다투는 형제가 있었는데, 공이 옳고 그름을 묻지 않고 곧바로 형제간에 사랑하고 아끼는 이치로써 깨우치니, 말을 마치자 곧 싸움을 그쳤다. 어떤 사람이 처가 재산을 마음대로 하려고 하여 처제를 시집보내지 않아 처제 나이 서른이 다 되어가니, 즉시 그 사람을 잡아들여 혼사를 치러주게 하고 그 재산을 갈라주어 먹고 살 수 있도록 했다. 선생의 강직하고 밝음이 일도(一道)에 널리 알려져서 크고 작은 송사가 선생의 관아로 보내졌으나 또한 머물러 쌓이는 법이 없이 곧 해결되었다. 예에 의해(송사 해결로 받은)지포(紙布)에서 이득이 많았는데 그것을 모두 그 일을 맡은 관리에게 주고 좋을대로 이문을 취해 백성들의 요역(부역) (徭役)을 대신하게 하였다. 백성들의 이십 년 병역에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처음 있는 일이었다.)

 

4년 辛未(1571년), 선생 36세

선생이 학문을 권장하고 유학을 일으키는 것[勸學興儒]으로 정치의 근본을 삼으니 백성들이 그의 교화를 받아, 선생이 떠난 후 서원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이것이 학호서원(鶴湖書院)이다

 

5년 壬申(1572년), 선생 37세

울산에 있을 때, 파산(坡山) 청송서원(聽松書院)을 창건하려함에 우계(牛溪)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여러 학자들이 돌아가신 선생님을 높여서 사원(祠院)을 세우고자 하니 지금 비록 늦은 듯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진실로 성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한 마디 드릴 말이 있습니다. 제가 오래 상 성안공(尙成安公) 문하에 있으면서 선생님의 덕업(德業)과 학문, 의로운 행위가 선생님의 숙부와 더불어 진실로 노위(魯衛) 라 이를만 하다는 것을 무척 많이 들었습니다. 비록 그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여 새로 학문을 하는 후생들이 들어 아는 것이 넓지 못하나, 김모재(金慕齋)의 지문(誌文)을 참고해 본즉, 성안공의 말한 것이 또한 깊이 알고 말한 것이라, 성안공의 말과 차이가 없습니다. 사원을 세우는 날을 맞아 두 선생님을 그 가운데 함께 모신다면 하남(河南)의 두 현인이 우리 나라에서 다시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이 어떠한지요. 율곡학사와 더불어 경모하는 학도들에게 상의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하였다. 가을에 모부인의 병으로 체직되어 돌아와 승문원 이습관(承文院肄習官)이 되었다.

윤(閏) 2월 29일에 넷째 아들 명준(命俊)이 서울 집에서 태어났다.

 

6년 癸酉(1573년), 선생 38세

봄에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 벼슬을 받고, 다시 성균관 사예(司藝)가 되고, 사간원 정언(正言) 및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충청도 재상어사(灾傷御史)에 제수되었다.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돌아와서 직강 내섬첨정(直講內贍僉正)에 제수되고, 다시 전라도 군적경차관(軍籍敬差官)에 제수되었으나 절도공의 병환으로 소를 올려 면직을 허락받았다.

 

12월에 청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청주는 바야흐로 군적을 쇄신하려던 참이었는데, 공이 부임하여 곧 달아난 것을 찾고 숨은 것을 검사하고, 간사한 것을 조사하고 거짓된(위조된) 것을 심사하여 한달만에 포졸들이 모두 모였다. 본래 수효 외의 포졸들은 따로 두 군대(二隊)를 두어 흩어져 달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7년 甲戌(1574년), 선생 39세

성보(姓譜)를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정숙공(貞肅公) 탁(鐸)과 더불어 성보를 편찬, 개정하였는데, 전의이씨본원(全義李氏本源)과 조선가훈(祖先家訓), 국조성전(國朝盛典) 등 세 조목을 성보의 첫머리에 실었다.

 

모부인의 병으로 체직되어 직강에 제수되고, 경상도 재상(灾傷)경차관에 제수되었다가, 부임하기 전에 전라도 추고(推考) 경차관으로 제수되었으나 모두 모친의 병으로써 사직하고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다. 얼마 있다가 사헌부로 들어가 지평 지제 교(持平知製敎) 겸 춘추관 기주관이 되었는데 직제학이 이를 머무르게 하는 차자(箚子)를 올려 곧 한성 서윤(漢城庶尹)에 제수되었다.

9월에 정부인(貞夫人) 우씨의 상을 당했다.

 

8년 乙亥(1575년), 선생 40세

12월에 절도공이 세상을 떠났다.

 

9년 丙子(1576년), 선생 41세

2월에 절도공을 양근(楊根) 서종면(西終面) 야미곡(倻美谷) 동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정부인 우씨와 합장했다)

7월에 양주공(楊卅公) 묘표를 지어 묘비에 썼다.

9월에 조고(祖考) 흡곡공(歙谷公)과 조비(祖妣) 류씨(柳氏)를 합장한 묘의 묘표를 지어, 묘비에 썼다.

 

10년 丁丑(1577년), 선생 42세

우계(牛溪)에게 편지를 보내 상례(喪禮)에 관해 논하였다.

 

11년 戊寅(1578년), 선생 43세

삼년상을 마쳤다. 사복 첨정(司僕僉正)에 제수되고, 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진주(晋州)는 땅이 넓고 산물이 많으나 토호(土豪)들의 전횡으로 인한 근심은 울주  보다 10배나 더하였다. 선생이 거상(居喪) 중에 있을 때부터 공이 상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진주를 다스리게 하자는 조정의 의논이 있었는데, 이때가 되자 과연 진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공이 진주에 내려가서 먼저 고을의 폐단과 백성들의 어려움을 찾아보고 그것을 한 번에 개혁하였다. 조세를 걷을 때 잘 사는 집들은 온갖 수를 써서 내기를 피하고 못사는 백성들만이 부잣집 곡식을 쌓아주느라 고생하였다. 선생이 전부(佃簿)를 살펴 거둬들이니 감히 전부와 다르게 내는 자가 없었다. 향사(鄕社)와 사마소(司馬所)가 남아돌게 가지고 있던 밭(논)과 종(奴)들을 남명서원에 두었다. 또 일에 저촉되는 바가 있으면, 뿌리를 뽑고 권세가 강한 사람에게도 너그럽게 하지 않았다. 그러자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 공을 모함하기 위해 하리(下吏)들과 더불어 몰래 병부(兵符)를 훔치고, 공이 그 일에 연류 되어 면직되기를 바랐 다.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서 허물이 있는 사람 몇 명을 국문하게 하니, 그 무리들이 서울로 가서 흩어져  공을 무고하고 비방하는 말을 크게 퍼트렸다. 선생이 즉시 소를 올려 더 이상 재임할 수 없는 형편을 아뢰고 바로 관을 떠났다. 가는 길에 임금의 만류하는 비지(批旨)를 받들었으나 이미 어찌할 수 없었다.

10월에 울산8경시발(跋)을 지었다.

11월에 남명 선생묘에 제사지냈다.

 

12년 己卯(1579년), 선생 44세

10월에 휴암(休菴) 백(白)선생 인걸(仁傑)의 상에 곡하였다.

남방(南坊) 회현리(會賢里)에 귀우당(歸愚堂)을 짓고 거하였는데, 도서와 화죽(花竹)으로 즐기면서 생을 마치려는 것 같았다.

10월에 회양부 신안역 설창기(淮陽府新安驛設倉記)를 지었다.

윤사숙(尹思叔) 엄(儼)을 장수(長水)현감으로 보내는 서(序)를 썼다.

8월에 다섯째 아들 경준(耕俊)이 서울집에서 태어났다.

 

13년 庚辰(1580년), 선생 45세

조정에서 생각하기를 강계(江界)는 서쪽 변방의 중요한 진(鎭)인데 쇠잔하고 피폐한 것이 심하니 유수(儒帥)를 쓰자는 의논이 있었다. (이에) 공을 통정(通政)의 계(階)로 올려 부사로 제수하니 사람들이 흡족하게 여겼다. 강계에 부임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어루만져 달래고, 답답한 일을 찾아 해결해 주어서 백성과 병졸들이 크게 생기를 찾게 하고, 즐겨 일하여 일하는 피로를 잊게 한 다음에야 성이나 담을 쌓는 일을 시작하였다. 일을 할 때 공이 몸소 돌을 져 나르며 창화(倡和)하니(도우니),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성(城)과 못과 기계가 산듯하게 그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어사(御史)가 공이 제일 낫다는(最) 보고를 올리니 임금이 표리(表裡)한 벌을 내려 총애하고 가상하게 여겼다.

 

14년 辛已(1581년) 선생 46세

군(郡)에 있을 때 편장(褊將), 비장(裨將)을 엄하게 통솔하되, 때때로 활쏘기 시합을 열고 잔치를 베풀어 장수들을 후하게 대접하여, 장수들이 공의 위엄과 사랑을 알게 하였다. 연강(沿江)의 여러 장수들도 또한 감화를 받아 감히 비방하지 못하고「공의 소문을 들었는가」하였다.

 

회재(晦齋) 이 선생이 일찍이 이곳에 유배되어 8년 있다가 세상을 떠나니 그 사당이 부치(府治) 동쪽에 있는데, 사당이 낮고 좁아서 제사를 조촐하게 지낼 수 없었다. 이에 위패를 고치고  몸소 기(記)를 쓰니 일부(一府)가 이를 삼가 본보기로 삼았다. (처음에는 기백(箕伯) 김공(金公) 계휘(繼輝)에게 기문(記文)을 청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아, 다시, 율곡, 우계 두 공에게 청했더니, 도리어 공에게 쓰라고 맡겨 왔다.(위임했다.) 공이 기를 써서 보내니 율곡, 우계 두 공이 비말(批抹)을 해서 돌려 보냈다. 이에 회재 육잠(晦齋六箴)과 함께 학교(글방)에 붙여 두었다.)

3월에 쇄연정을 짓고 기(記)를 지었다.

 

15년 壬午(1582년), 선생 47세

이 때 북쪽 오랑캐가 다시 왕성해져서 변방의 보고가 날로 위급하니 온 나라가 시끄럽고 어수선했다. 여름에 임금이 비변사에 명하여 북방의 임무를 맡을만한 사람을 의논해 뽑도록 하여 7사람을 뽑았는데, 공의(公議)가 모두 공으로 으뜸을 삼는 쪽으로 모아졌다. 이에 가선(嘉善)으로 직위를 높여 북병사(北兵使)에 제수했다. 장차 북방으로 떠나려 할 때, 율곡이 바야흐로 본병 겸 비국(本兵兼備局)· 사(有司)의 직책에 있었는데, 사대문 밖에서 전별하고 시를 주어 이르기를,

임금님 교서 보기도 전에

곧장 대장단(大將壇)에 오르니

북문은 방비를 새롭게 하고

서쪽 변방은 옛날의 굳센 관문이라.

오는 길은 쉬어도 가는 길은 어렵고,

은혜는 따사롭고 위엄은 서늘하다.

술 한잔 부어 길신에 제사드리니

가을 기운 신선함을 더하네.

 

임소에 이르러, 본도(本道)가 해마다 수환(水患)을 입어 백성들은 병들고, 군졸들은 고달프다는 것을 듣고 이를 구할 여러 방책을 두루 쓰지 않음이 없었다. 성채와 보루 쌓는 일을 부지런히 하고 성지(城池)를 다시 만드는데 몸소 자로 재고 쌓아올려 완벽하고 치밀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역하는 장정들이 피로하여 원망할까 염려하여 속목(贖木)을 나누어 주고, 진(鎭)의 장수들이 양식이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급료를 더 주니 장사(壯士)들이 열심히 하였다. 여러 진을 수행하러 가서는 반드시 사람들을 모아놓고  앞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조정이 그대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다른 도(道)보다 유별나다. 무릇 그대들로 하여금 오랑캐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하여 막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대게 장차 그대들의 부모를 편안하게 하고, 그대들의 집과 가족을 안전하게 하고자 함이다.」하니, 사람들이 모두 둘러서서 절하고 기뻐서 손뼉을 치며 돌아갔다. 예로부터 이 도(道)에 임명되는 사람들은 대체로 무인(武人)이 많았는데, 나라의 근심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살찌우기만을 일삼아 군대가 날로 궁핍해졌다. 공이 이 모든 것을 혁파하여 없애니 군인과 백성이 안도 하였다. 그 해 가을에 역병이 크게 돌았는데 널리 약을 보내서 구하니 일경(一境)이 소생 할 수 있었다.

 

겨울에 등창을 앓아 겨우 나아서 아직 완쾌되지 않은 중, 선생에게 와서 민폐를 알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선생이 벌떡 일어나 탄식하기를 마지 않으며 말하기를「하민(下民)의 괴로움이 이와 같음을 내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하고 밤새 궁리하니 옛날의 등창이 재발해서 겨우 낫게 하였다.

 

16년 癸未(1583년), 선생 48세

북방에 진주한 지 2년이 되었다. 북방을 영원히 조용하게 하려는 뜻이 있어 오랑캐를 막을 계책(防胡策) 20조(條)를 올리니, 임금이 이품이상 벼슬에게 명하여 비국(備局)에서 이를 의논 하라고 하였다. 이 당시 사암(思菴)이 영의정으로 서애(西崖)가 도승지로 그 자리에 있었는데, 삼공(三公)이 서애에게 임금이 공에게 회답하는 계(啓)를 기초하게 하였다. 서애가 붓을 들기도 전에 한낮이 되니 내시가 영의정이 병조판서(이이)를 청하여 함께 의논할 것을 재촉하였다. 율곡이 와서 서리(胥吏)에게 초주지(草注紙) 한 권을 붙이게 하고 순식간에 쓰기를 마쳤다. 그 글을 올려 임금이 읽으시게 하였다.(율곡전서)

 

봄에 북방 오랑캐 니탕개(尼湯介) 등이 주변 부족들과 연합하여 경원(慶源)을 갑자기 쳐들어왔다. 부사 김 수(金鐩)가 절제사(節制使)에게 아뢰지 않고 적을 가볍게 보고 싸우다 패하여 달아났다. 오랑캐가 아산(阿山), 안원(安原) 등의 보루를 잇달아 함락하고, 진군하여 종성(鍾城)을 포위하였는데 그(오랑캐) 형세가 매우 강성 하였다. 그러나 공이 미리 온성(穩城)부사 신 립(申砬), 부령(富寧) 부사 장 의현(張義賢), 종성판관 원 희(元熹) 및 휘하 장사 신 상절(申尙節), 김 우추(金遇秋), 변 국간(卞國幹), 이 종인(李宗仁), 김 준민(金俊民), 권 홍(權弘), 유 중영(柳重榮) 등에게 명하여 험한 곳을 막고 요지를 지키게 하여, 오랑캐의 예봉을 꺾고 진을 함락시켜 곧바로 경원을 되찾았다. 그리고 승세를 타고 북쪽으로 추격해 가서 오랑캐 소굴 팔백 여호를 불질러 소탕하고, 이백삼십여명의 목을 베어 오고, 적의 군량미와 기계를 모두 수확물로 가지고 왔다. 오랑캐가 이에 얼굴을 바꾸고 항복하기를 청하여 남쪽을 수 십년 동안이나 넘보지 못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공을 모함하는 자들은 공이 경원의 패한 소식을 듣고도(공이) 겁을 먹어 즉시 가서 구하지 않았다고 하며 공교로운 말로 세상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임금의 마음을 선동하고, 계를 올려 이를 다스리라고 청하였다. 마침내 김 수의 형(刑) 집행을 지체했다는 죄목에 얽혀 의주(義州) 인산(麟山)으로 정배되었다.

 

(처음에 경원이 패한 소식을 이르자 공을 모함하는 자들이 죄를 얽어 날조하고, 계를 올려 공을 잡아오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이를 허락하기를 여러 번 고민하며 갑자기 잡아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더욱 날카로와져서 임금이 마침내 그 말을 따랐다. 얼마 있다, 승첩한 소식이 잇달아 이르러, 다음 날은 경원을 되찾고, 그 다음 날은 통개동(通介洞) 팔십 여 소굴을 불지르고, 또 다음 날은 금득탄(金得難), 안두리(安豆里) 등 사백 오십 여 부락을 빼앗고, 또 백 여명의 목을 베어 오니 남은 적들이 멀리 달아났다고 하였다. 선묘(宣廟)가 비국에 전교하기를,「이 제신이 이렇게 이길 것을 내가 실로 이미 헤아리고 있었으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방하는 까닭에 나 또한 능히 스스로 고수하지 못하고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제 이미 공을 세웠으니 잡아들이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하니, 비국에서 아뢰기를 「진실로 임금의 하교하심과 같은 생각이오나, 다만 잡아 들이라는 명을 이미 내렸으니 중도에서 멈추어 돌아가게 하는 것도 전도(顚倒)된 일입니다. 잡아 온 후 밝게 처리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이 때 율곡이 병조판서로 있다가 공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내가 못나고 용렬해서 소의간식(宵衣旰食)에 이르렀으니 분하고 원통하다 할만하다. 징발하여 보낸 것이 이르지 않았으니 그것이 가장 큰 근심이고, 백성이 흩어진 지 오래라 하니 그 형제가 실로 그럴만한 것 같아 탄식할 만 하도다. 다행이 종묘사직의 도우심을 입고 여러 장수들이 힘써 싸워서 오랑캐의 소굴을 불질러 소탕하여 그들을 위축시킬대로 위축시켰으니 그 공 또한 작다고 할 수 없다. 성안에 떠도는 말은 귀로 다 들을 수 없을 정도라서 임금님 역시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소. 처음에는 비록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리셨지만 곧 몹시 후회하고 계시니 영공(令公)은 안심하고 올라오라. 무기의 많고 적음을 살펴서 무기 창고에 두었으나 소장한 것이 심히 부족하다고 한다. 내가 썩어 빠진 선비로 마침 군대의 일을 주관하다 이러한 위기를 맞게 되어 그만 두고자 하였으나 그것도 안 되고, 다만 부끄러움을 품고 있을 따름이오.」하였다. 또 며칠 있다가 다시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요 며칠사이에 승첩한 소식이 연달아 이르러 장사들의 공을 논하는 한편으로, 주장(主將)을 잡아 올리니 경중(輕重)이 맞지 않는 것이 심히 탄식할만하다. 내가 전쟁 중에 장수를 바꾸는 것이 불가하다고 힘써 논쟁(주장) 했지만 여론이 물끓듯하고 만(萬) 사람이 다 같은 말을 해서 도저히 여론을 깰 수 없었으니 어찌하겠는가? 임금님께서 곧 깨달으셨으니 끝내 무사할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돌아오라. 지남 번 편지에 다만 위엄을 높이라고 한것은 장사(壯士)를 대하는 도(道)를 말한 것일 뿐이다. 만약 오랑캐를 배반하였다면 어찌 그들의 도움으로 적을 토벌할 수 있었겠는가? 임금께서도 자네의 계책이 옳았다고 생각하시네. 계함(季涵)은 서생인데, 김 절도사가 일에 너무 노련해서 그 말이 이렇게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다. 그가 만약 가장 못된 자를 잡아와서 항복하지 않는다면 용서하려고 해도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부디 무사히 오기를 천만 번 빌겠네.」하였다. 당시의 현사(賢士)와 대부(大夫)들이 거듭 존경하고 원통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으나, 시기하고 해를 끼치려는 자들의 음모를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죄를 다스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선묘께서 공이 북방에 있으면서 공을 세우고 죄가 없다는 것을 환히 아셔서 장차 용서하고 용서하려하니, 공에게 유감이 있는 자들이 또 다시 김 수의 형 집행을 하라는 표신(標信)을 사흘이나 지체하였으니 임금의 명을 저버린 것 이라고 하여 정배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라

 

살펴보건대, 김 수가 상부에 알리지 않고 경솔히 전쟁을 한 것이 비록 군율(軍律)을 어긴 것이기는 하지만 공이 (이미) 패장(敗將)으로 하여금 오랑캐를 죽여 죽음을 면하게 한 것은 공을 세워 속죄하게 하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 김 수와 함께 곧 경원을 되찾아 그 공이 김 수에게 돌아가도록 한 뒤, 계를 올려 김 수의 목숨을 빌고 후명(後命)을 기다리느라고 형 집행을 사흘 지체했던 것이다. 이는 대게 자신의 군사들에게 신뢰를 잃지 않고, 또 임금이 무고한 사람을 잘못 죽이게 될까봐 염려해서 그런 것이니 이는 실로 장수로서의 체신을 깊이 얻은 것이다. 소인들이 도리어 이것을 가지고 죄를 만들고 화를 엮었으나 임금이 특별히 죽음을 면해주고 정배시켰다.

 

공이 의금부에 있을 때 무고를 당한 일은 염두에 두지 않고, 항상 북방의 일이 위급하고 어려운 것만을 생각하여 상소해서 그 뜻을 전하려고 소를 썼다가 말았다가 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귀양 가서는 죄인으로 처신하여 늘 작은 집에 머물면서 경서와 사서로 마음을 위로하였다. 인근의 태수와 벼슬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보내거나, 주목(州牧)이 관인을 보내 심부름을 하도록 한 것을 모두 물리치고, 주목이 혹 음악을 베풀어 그 적적함을 위로하려 하면 문득 손을 휘저어 말리며 말하기를, 「북방 오랑캐가 평정되지 않아 오랑캐의 화가 아직도 심한데, 내가 비록 제명되어 선비로 있지만 아직도 옛날의 대장이라. 비록 요망한 기운을 신속하게 쓸어내지는 못했지만 어찌 차마 술잔을 잡고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즐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잡아들이라는 명을 받고 조정의 의논이 날카로워서 장차 어떻게 될지를 예측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 삼등기(李三登)가 당시 금오랑(金吾郞)으로 있다가 공을 위해 개연히 말하기를 「이공이 고집이 세어서 남에게 굽히지 않는 성품이니 분을 못이겨 병이 될까 걱정이다. 내가 아니면 그 마음을 풀수 없으리라.」하고 공이 떠나는 길에 자청하여 와서 침식을 같이 하고, 정성을 다하여 구호했다고 한다.

 

6월에 맏아들인 승문 정자(承文正字) 기준(耆俊)의 부고가 이르르니, 공이 악식(惡食)을 먹고 그것이 병이 되어 10월 초(初) 6일에 복사에서 생을 마치니 향년 사십 팔세였다.

 

(임종에 둘째 아들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옛날부터 구래공(寇萊公) 같은 현인도 죄없이 귀양가서 죽었는데 나같은 사람이 한스러울게 뭐가 있겠는가?」하고 이어 「군대를 내어 이기기도 전에 몸이 먼저 죽는다(出師未捷身先死)는 구를 읊었다. 숨이 끓어지려 하고 소리가 목구멍 안에서만 겨우 나는데도 오히려 타이르며 근심하기를 마지않았는데, 모두 나라일만을 말하고 집안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날 밤 마른번개가 크게 세 번 울렸다. 이때가 또한 초겨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둘째 아들 수준(壽俊)이 일찍이 병구완을 하는데 향을 피워 놓고 기도하고 길흉의 효과가 있을 것을 기대하여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서 약에 타서 올려 목숨을 며칠 연장할 수 있었다.)

 

17년 甲申(1584년)

정월에 지범공(志范公)이 수레를 받들고 관을 붙들어 천리길을 맨발로 돌아왔다. 4월에 양근(楊根) 수회리(水回里) 동북방 언덕에 장사 지냈다.

 

지신(知申) 이 우직(李友直)이 계를 올려 선생 일생의 청백(淸白)함과 북방 일에 큰 공이 있음을 아뢰니, 임금이 그 말을 옳다고 여겨 즉시 공의 관직을 복원해 주었다. 그리고나서 임금이, 공의 죄는 미미하고 공은 두드러지며 공의 맑은 절개는 높여줄만하다고 깊이 생각하고 병조판서를 추증(追贈)하려 하였다. 친히 매우 절절하게 써서 그것을 대신들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니 의논이 합치되지 않음이 없었으나, 노 수신(盧守愼) 만이 홀로 관을 너무 지나치게 올려 준다고 말하였다. 이에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묘에 제사지내게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이 제신의 맑고 깨끗한 지조는 보통 신하들보다 뛰어난 것이다. 맑은 절개가 있으면 비록 큰 죄를 지어도 오히려 마땅히 용서받는데, 하물며 이미 죽었음에랴.」하고, 명하여 직첩(職帖)을 내리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제신이 귀양을 간 것은 군기(軍機)에 연루된 것이 아니라 단지 표신(標信)을 사흘 미루어 두었기 때문이다. 경원의 변을 당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을 잘 이끌어서 변방 오랑캐들을 모두 멸하고 국위를 떨쳤으니, 지금 조정 신하들이 화의(和議)를 본받으려 하는 이 때를 당하여 더욱 그 생각이 난다.」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북방에 변란이 일어난 것은 마치 종기가 몇 년이나 안으로 곪아 있다가 하루 저녁에 터진 것과 같다. 대명(大命)이 이를 쫓음은 간신들이 권력을 희롱하고 가렴주구 한 결과가 아님이 없었다. 조정이 변방의 일을 치지도외하고 있었으니 이런 변란이 생긴 것은 (오히려) 늦은 것이다. 겁을 집어먹은 사람이 약한 병졸 수백 명으로 오랑캐 부락을 섬멸할 수 있겠는가. 제신을 가리켜 위축되어 후퇴했다고 하는 자들은 제신으로 하여금 원 적(元績)이 되게 하려는 것인가. (가정(嘉靖) 을묘(乙卯)년, 원 적이 전라병사로 있었는데 왜적이 강진(康津)을 함락하였다. 원 적이 주장(主將)으로 그 가운데서 신중하게 하지 않고 경솔하게 나아갔다가 패하여 적의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임금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또 말씀하시기를 「전에 없던 변고가 그에게 일어났으니 또한 원통하지 않은가? 내가 생각하건데, 조정이 경원을 잃자 제신이 그것을 되찾았고, 배반한 적들의 죄를 벌하였으니 이는 드문 공훈이다. 제신이 지금 만약 있다면 반드시 나의 근심을 풀어주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무릎을 치며 탄식하는 까닭이니 그에게 포상을 더해주고자 한다. 」하였다. (선묘실록)

 

둘째 아들인 지범공이 행장(行狀)을 쓰고, 사위인 신 상촌 흠(申象村欽)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짓고, 간이(簡易) 최 립(崔岦)이 묘지(墓誌)를 짓고, 월정 윤 근수(尹根壽), 사류재(四留齋) 이 정암(李廷馣), 백사(白沙) 이 항복(李恒福), 승지(承旨) 윤 우신(尹又新), 여양(呂陽) 진 욱(陳郁)이 행록(行錄)을 지었다.

 

양근(楊根)의 미원(迷源), 청주(淸州)의 송천(松泉), 울산의 학호(鶴湖) 등의 세 군데 서원에서 제사지냈다.

 

이십년 뒤인 계묘년(1603)에 둘째 아들 수준이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領) 경연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世子師)를 추증하였다.

 

◈ 보유(補遺)

선묘(宣廟)조 계미(癸未) 2월 7일에 북병사(北兵使) 이모(李某)가 계(啓)를 올려 「변방의 오랑캐 이탕개(尼湯介)가 변란을 일으켜 경원(慶源)을 포위하였습니다. 임금이 삼공(三公), 비변사(備邊司), 당상관(堂上官)을 인견하고, 오 운(吳沄), 박 선(朴宣)으로 조방장(助防將)을 삼아 용병(勇兵) 팔천 명을 이끌고 앞서 나가게 하고, 경기감사 정 언신(鄭彦信)을 참찬 도순찰사(叅贊都巡察使)로, 이 용(李)을 남병사(南兵使)로, 김 우서(金禹瑞)를 방어사로, 임명하였다. 초(初) 9일에 적이 경원의 안원보(安原堡)를 함락하였다. 임금이 경원부사 김 수와 판관(判官) 양 사(梁思) ○ ○ 를 진(陣) 앞에 효시하게 하고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육진(六鎭)을 오랑캐인들로 울타리를 삼은 것은 그 생각이 앞을 내다본 것이다. 육진은 번호(藩胡)로 막지 않으면 또한 지키기가 어렵다. 나라에 순응하는 자는 어루만져주고, 은혜에 배반하는 자는 토벌하여 한번 노(怒)함의 위엄을 보여주고 그 소굴을 평정한뒤 ○ ○ ○ 을 택하여 다시 변방의 울타리로 삼고 은혜와 위엄으로 어루만지는 것이 좋은 계책이다.」하였다. 의논하는 사람이 아뢰기를 「임금님의 말씀을 받들고 보니,말씀이 실로 때에 적절합니다. 순찰사로 하여금 병력과 군량을 헤아리게 해서 하늘을 대신하여 벌을 내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계(啓)에 따르도록 하라.」하였다.

 

13일에 비변사에서 계를 올려 「이모(李某)가 서생(書生)으로서 이러한 변방의 변고를 당하여 조치하는 계책이 소홀하고 허술합니다. 먼저 그를 파직하고 김 우서로 (그를) 대신하게 하십시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바꿀 필요가 없다. 북병사 이모가 계를 올렸는데, ○ ○ 훈융진(訓戎鎭) 첨사(僉使) 신 상절(申尙節)과 온성(穩城)부사 신 립이 힘을 다해 싸워서 오십 여명의 목을 베고, 추적하여 강을 건너가 부락을 불태워 소탕했다고 한다. 」하니, 비변사에서 계를 올려,「이제 북병사의 계를 보니, 훈융의 싸움에서 이긴 것은 신 립의 용맹을 떨쳐 힘을 다해 싸운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포상하여 전사(戰士)들을 격려함이 마땅합니다. 또 북병사가 원병이 모일 것을 기다리며 바야흐로 군대를 배치하고 있어서 군(대)의 형세가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 다른 사람으로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바꾸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실로 일의 형편에 합하는 것입니다.」하였다. 또 계를 올려「김 수 등이 전쟁에서 패한 죄는 주장(主將)이 생각해서 형(刑)을 집행하면 그만입니다. 이제 주장의 명령으로 공을 세운 것이 뚜렷하고, 고립된 군사로 사십 여명의 목을 베었으니, (비록) 죄가 씻어지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그를 불러서 국문하고 급히 일정한 형벌을 행하지 않는다면 미진함이 있을까 합니다. 신(臣) 등이 모여서 의논하여 뜻을 같이하고 감히 계를 올립니다.」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4일에 이르기를, 「이제 계획을 세운 것을 보니 일이 전도되어 만족스럽지 못한 곳이 많다. 경원 일부(一府)가 적의 소굴이 되었다는데도 아직 한 가지 기책(奇策)을 내서 적을 물리치고 백성들을 안전하게 해주지 못하고, 병사를 바꾸어 임명하라는데 까지 이르렀다. 비록 김 우서가 적합하다고 해도, 그는 이미 방어사가 되었으니 적을 토벌하는 임무를 전적으로 맡은 것이다. 이모(李某)가 군사일에 익숙하지 못하다 해도 김 우서와 힘을 합해 앞뒤에서 호응하여 적을 몰아치면 도움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뜬소문을 퍼뜨려 갑자기 파직 하라고 하니, 설사  이모(李某)에게 죄를 준다 해도 지금이 어디 그럴 때인가? 나는 그 말을 따르지 않겠다.」 하였다. 저녁에 또 변방의 소식을 보고 말하기를 임금님의 교서가 옳다고 생각되니 이 뜻을 다만 색승지(色承知)에게 알리라. 그렇게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16일에 또 계를 올려「군대를 보내 적을 공격하여 오랑캐 부락을 거의 다 소탕, 전멸하고 오랑캐 머리 오십 여급(級)을 바칩니다.」하였다. 임금이 비변사에 이르기를 「이모(李某)가 이길 것을 내가 실로 이미 헤아리고 있었으나 여러 사람들이 모두 비방하는 까닭에 내 생각을 고수하지 못했다. 이제 이미 공을 세웠으니 잡아오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하니, 비변사에서 그것을 의논하고 회답하기를「진실로 임금님의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다만 도사(都事)를 이미 보냈으니 중도에 돌아오게 하는 것도 전도된 일입니다. 잡아들인 뒤 밝게 처리하심이 어떠하십니까? 」

 

또 계를 올려「적 오랑캐 부락을 모두 소탕하고 육십 오명의 머리를 베었습니다.」하였다. 비변사에서 계를 올려「탁두(卓頭) 부락은 가장 막히고 험한데다가 가장 못된 오랑캐가 있는 곳인데, 김 우추 등이 승세를 타고 진군하여 소굴을 불태워 소탕하고 나서 그들이 숨어있는 곳까지 나아가, 목을 베고 사로잡은 사람이 많고 군대를 온전하게 해서 돌아왔으니 나라의 수치를 씻어낸 것이라  할만합니다. 신(臣) 등이 처음에 오 운(吳沄)에게 말한 것은 단지 무고한 오랑캐들에게 함부로 형벌을 내려 다른 곳의 번호(藩胡)로 하여금 서로 선동하게 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어찌 오랑캐를 토벌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모(李某)가 계책을 쓴 것이 실로 일의 형세에 적합하였으니, 도순찰사의 계를 기다렸다가 상을 내림이 어떠하십니까?」(日月錄)

 

23일에 북병사 이모(李某)가 아뢴 원정을 바탕으로 이전의 죄를 판결하였다. 그는 김 수 등에게 즉시 형을 집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형에서 감하여 정배되었다.(東閣雜記)

 

사간원(司諫院)에서 계를 올려「성이 함락되어 나라를 욕되게 한 죄는 실로 주장(主將)에게 있습니다. 강토를 지키는 신하가 이미 살륙을 당했으니 이모(李某)는 홀로 면할 도리가 없고, 심지어 사흘이나 표신(標信)을 마음대로 유보하였으니 명령을 어기고 법을 행하지 않은 죄가 매우 큽니다. 청컨대 사형에서 감하라는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의논한 뜻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이모(李某)에게 성이 함락되어 나라를 욕되게 한 죄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치다. 창졸간에 변을 당하여, 주선하고 계책을 세워서 응수한 공적이 있으니 지금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은 옳지 않다. 표신을 유보한 일만은 훗날 형을 행하여야 할 일로, 거기에 관계된 죄는 매우 크다. 그러나 그 정황을 살핀다면 함부로 짐작하는 것이 옳지 않다.」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계를 올려「북병사 이모(李某)는 거칠고 포악하며, 뜻을 굽히지 않아 일을 처리하는데 전도된 것이 많았습니다. 북문을 수비할 때부터 위세와 포학만을 일삼아서 여러 보루가 배반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번호(藩胡)들도 원망하여 배반하였으니, 오늘의 변란에 이르게 된 것은 실로 이모(李某)가 한 일입니다. 그는 변란이 생기자 겁을 집어 먹고 후퇴하여 웅크린 채 속수무책으로 있다가, 고립된 성이 함락되었을 때 겨우 수식 경이면 갈 거리였는데도 달려가서 구하지 않고 장사(將士)의 존망(存亡)과, 백성과 가축의 어수선함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였습니다. 장계(戕啓)의 일도 전도되고 뒤얽혀, 조처한 바가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군기(軍機)를 그르치고, 성이 함락되어 나라를 욕되게 한 죄가 큽니다. 청컨대 법률에 따라 죄를 바로잡아 주십시오.」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이모(李某)는 어찌하여 이런 논란을 듣는가? 잠시 그 의논은 천천히 하도록 하라. 지금은 결코 그 의논을 따를 수 없으니 나의 뜻을 본받아 다시는 말하지 말라.」하고 마침내 인산진(麟山鎭)으로 귀양보냈다.(宣廟寶鑑)

 

김 장포 행(金長浦行)은 청강공파 의기가 통하는 교우였다. 장포의 집에 불이 났을 때, 청강공이 별당(別堂)을 철거하고 기와 남은 것을 실어가서 장포 집의 마당에 쌓아놓았는데도 장포가 그것으로 지붕을 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권하면 장포는 이 집은 초가인데 하필 기와로 해야겠는가?」하였다. 청강공이 돌아가셨을 때 가난해서 상을 치르지 못하니 장포가 말(馬)을 부조하였다. 그들은 대게 맑은 절개와 기개가 서로 비슷한 사람들이었다.(長浦墓碣, 조익(趙翼)이 찬하였다.)

 

이공 정암(李公廷馣)이 임진난을 당하여 연안성(延安城)을 지키고 있을 때, 적이 성을 겹겹으로 포위한 지 7일째 되던 날 밤에 잠깐 잠이 들었다. 청강이 중훈(仲薰)을 불러 말하기를 「적이 남성(南城)에 올라가고 있으니 일이 급하게 되었다. 화살 16개를 줄테니 이것으로 막게 하라.」하였다. 깨고 나니 한 꿈이었다. 월천(月川)이 성에 올라 화살을 쏘아서 과연 크게 이겼다. 뒤에 풍덕(豐德)으로 물러나 살고 있는데, 청강이 또 와서 말하기를「내일은 자네가 돌아가는 날이다. 내 둘째 아들 통진(通津)현감 수준을 보내 임종하게 하겠네.」하더니 과연 꿈속의 말과 같이 되었다.(四留齋集) (월천 이 정암, 고옥(古玉) 정 작(鄭碏), 제봉(霽峯) 고 경명(高敬命), 분소(分素) 이 언이(李彦怡)는 모두 공의 다섯 신교(神交)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