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수재 - 청강공 재실 전경

 

선조 계미(1583)에 국가에서는 만주땅의 함경도 인접하여 있는 만주 오랑캐의 침입에 자주 시달리어 이 오랑캐를 막을 적임자로 청강부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니 이 직함이 바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이다. 청강공께서는 이 직함을 띠고 부임하시었으니 이 어른께서는 삭방(朔方)을 영구히 평정할 수 있는 도략이 있어서 방호책 20조까지 올린 일이 있었다. 신립, 김우추 등을 거느리고 경원을 진격하여 회복하고, 곧 이어 육진을 평정하고 두만강을 건너 오랑캐의 소굴을 쳐 부수고 내애관(乃欸關)을 사로잡으니 이 오랑캐들이 감히 우리 나라를 넘보고 침입하지 못한 것이 수십년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애매하게 덮어 씌우는 죄의 그물에 걸리어 안산으로 귀양가시게 되었다. 맏아드님 부훤공께서 너무 슬퍼하여 피를 토하고 그해 6월 8일에 세상을 떠나시었다. 청강공께서 너무나 충격을 받으시어 이내 병으로 앓으시다가 10월 6일에 인산의 적소에서 세상을 떠나시었다. 둘째 아드님 용계공 수준께서 병 구완을 하시면서 단지(斷指)를 하여 사흘 동안의 기일을 연장하게 하였다. 용계공께서 갑신년(1584) 정월에 영구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오시어 4월에 수회리 간좌(艮座)자리에 모시었고, 계사년(1593) 8월에 정경부인 목천 상씨께서 돌아가시어 청강공 묘소에 부장한 뒤로 이곳이 세장지지가 되었다. 공의 현손되는 몽탄공 萬雄께서는 늘 산수를 감상하시는 특성이 있으시었는데, 꿈에 산수가 절승한 곳을 유람한 일이 있어서 그런 곳을 찾아 집을 짓고 살려는 염원이 간전하였는데 그후에 성묘하러 수회리로 왔다가 청강공께서 사시던 집터를 보니 꿈에 유람하던 곳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이에 냇가 언덕에 정자를 짓고, 청강시화에 나오는 녹수(綠水)라는 이름을 따서 정자 이름을 지었다. 이것은 선조의 끼친 뜻을 이어받으려는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200여년이 지나 청강공의 산소 아래 몽탄공의 정자 앞에 병사(丙舍)(1)를 지었다. 나중에 정자를 이리 옮기고 정자의 이름을 재실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로 보면 옛집을 그대로 두고 이름만 새로 붙인 셈이다. 어째서 푸른물(綠水)일까? 대체로 ‘물’의 특성은 밤낮을 쉬지 않고 아래로만 흘러 내려가는데 바람이 불어서 물결을 일으키지 않으면 강물은 언제나 고요하게 맑은 특성을 유지한다. 이것은 사람에게 비유하면 이욕에 본심이 흔들리지 않으면 마음의 맑고 밝고 깨끗한 본심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여울 물이 빠르게 흘러서 영과(盈科)(2)한 다음에야 다시 흐른다. 이러한 특성은 사람이 학문을 성취하려면 그 학문을 완전히 이해한 뒤에야 다른 과정으로 옮기는 것과 아주 비슷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학문을 하려면 서두르지 말고, 설차지 말고 차근하게 학문과 인격을 쌓아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청강공과 몽탄공 두 선조께서 ‘강의 맑음’과 ‘물의 푸름’을 따서 시(詩)의 호(號)를 짓고 정자의 이름을 지은 깊은 뜻은 물의 특성을 원통하여 마음을 맑게, 학문이나 인격은 맑고 밝고 깨끗하게 가져서 흔들리지 말라는 깊은 뜻을 남아 일깨워 주신 것이다. 훗 자손들이 ‘강물의 맑음’을 거울 삼아 자신의 마음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것은 물질만 보고, 물질속에 깊은 뜻이 있음을 살피지 못하는 것과 같다. 깊은 물의 잔잔한 물결만 보고 도의(道義)의 본체가 쉼이 없는 것을 살피지 못한다면 이것은 나타난 현상만 보고 그 현상 깊은 곳의 오묘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綠水’ 두 글자를 재실의 문 위에 붙인 것은 사실은 선조 어른의 학문하는 태도를 잊지 말라는 뜻이다. 이 재실에 들어서면 淸江이라는 글속에 잔잔하게 흐르는 끼친 깊은 철학이 이 세상 다하도록 마르지 않음과, 綠水의 쉼이 없이 졸졸 흐르는 물줄기가 몇 만겁(萬劫)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는 그 법칙과 옛 어른을 우러러 받들고 근본을 생각하는 느낌이 보통 때의 몇 백배 일어나서 위로는 묘제(墓祭)를 정성껏 받들 효심과 아래로는 종족끼리 돈목할 생각이 음복하는 자리에서 일깨워져 선조께서 가르치시어 후손에게 남긴 깊은 뜻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니 물같이 이어지는 경사가 재실 앞을 흐르는 푸른 물과 함께 그지 없이 이어질 것이기에 이에 녹수재에 제하노라

청강공께서 세상을 뜨신 349년 신미년(1931) 9월 30일

11대손 통훈대부 국자사업 학로는 삼가 기록하고 12대손 용세는 삼가 씁니다.

 

<註>


 

(1)병사(丙舍) : 구사(柩舍)라고도 하는데, 영구(靈柩)를 잠깐 머물러 놓기 위하여 묘소의 남쪽에 지은 건물, 묘소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丙舍라고 한다.

(2)영과(盈科) : 움푹하게 파인 웅덩이를 ‘과(科)’라고 한다. 물이 흐르다가 웅덩이를 만나면 반드시 그 웅덩이에 물이 차야만 다시 흐르게 된다.

 

宣祖癸未 國家以北虜爲憂 淸江府君授而北 有永淸朔方之志 上防胡策二十條 與申砬金遇秋等進復慶源繼平六鎭 渡江而焚蕩蘇窟 虜乃欸關不敢南牧者數十리禩矣然竟罹文綱纍于麟山 家子負暄公痛恨嘔血是年六月八日卒 公悼亡成疾 以十月六日 易簀于鵬舍 龍溪公侍湯斷指延三日之命 甲申正月奉櫬東還四月葬于水回里艮坐 癸巳八月貞敬夫人木川尙氏 祔仍作世葬地 公之玄孫 夢灘公 有山水癖 夢遊一勝境 意欲卜居 其後省楸時入水回里 得淸江遺址宛然夢中所見也 作亭於川上 取淸江詩話 名以綠水 盖識其先世遺志也 歷二百餘年 建丙舍於淸江之墓下 夢灘公之亭前 移亭名爲齋號 寔仍舊而維新也 盖水之爲物不捨晝夜潤下奔流 而風不搖則江水淸 比於人之不爲利欲所動則 心之神明 澹然不昧 也觀其灘水急流則盈科而後進 似乎人之爲學成章而後達之義也 此兩世先祖以江之淸 水之綠 作詩號亭名 引物以發其意而終說破其心之澄淸 其學之成章 如詩之比興也 後世子孫因江水之淸不察吾心之明則 是見物而不知有則也 觀綠水之漣漪 不知道軆之不息則  但見象而不知有理也 故以綠水二字 又題於齋之楣實不忘先世之學也 入此齋則 淸江滾滾之澤 至百世而不渴綠水泱泱之流閱千劫而不變感古追遠之懷宜百倍於常時 上以致誠慤於墓祭 下以講睦義於餕席 無時不敬乎述先裕後之事則 如川方至之慶與齋前綠水共爲無窮矣是爲記

  公沒後三百四十九年 辛未 九月 三十日

   十一代孫 通訓大夫國子司業 學魯 謹識

   十二代孫                          容世 謹書

 

 

 

 

 

엎드리어 이 글을 짓습니다.

이미 해곡에 재실을 새로 지으니

그런 대로 오래 쌓였던 정성을 펴고 또

무돌이 언덕에 재실을 지으니

거의 선조의 뜻을 이어 받았네

순환의 법칙이 멀지 않으니

길이 그 성공을 보겠구나

거룩한 우리 청강 선공을

세상에서는 문무 겸전한 명신이라 부르지요

우리 가문에서는 충효를 이어 전하고

임금님의 가르침 잊지 않아서

임인(壬人)(1)의 함소(含笑)하는 말

곧바로 가슴에 새기어

한밤중 잠 못 이루고

비분 감개한 마음 가슴에 새기었네

그러나 돌아가신 후에야 임금님 은혜 내리시고

또 각 군의 긍식(矜式)(2)하는 많은 선비가 벌써부터 재실을 지으려는 공론이 있었으니

우리 종속의 감모하는 여러 자손이

어찌 재실 지을 정성이 없겠는가

유사(재실을 지을)의 발론이 있자마자

여러 일가가 만장일치로 찬성하여

맑은 시내의 언덕 깨끗하고 조강한 땅에 마침 좋은 자리를 잡아

선영의 아래에 깨끗한 집을 지으니

이보다 좋은 자리 어디에 또 있을까.

재목을 가리어 규격에 맞게 마르재어 까귀질할데 더 깍고 톱질할데 톱으로 켜고 지형을 참고하여 기초를 바로 세우려 팔 데는 파 내고 쌓을 데는 쌓아 놓고 좋은 날 가리어서 경치 좋게 자리 잡아 먼 동네 가까운 이웃 모두 다 모여 뜻을 함께하여 역사에 참여하고

위의 큰 집 아래의 작은 집을

차례차례 지었으니 장하고 아름답다

아담한 재실이여

재실의 규모가 높은 데 낮은 데 차서가

있으니 나이 따라 질서 있고

방 자리 무엌 자리 깨끗이 정돈되어 털끝만한 어긋남도 없이 잘도 이루었다.  

도편수 목수들의 재주도 좋지만

일을 맡은 유사의 정성 또한 갸륵하다.

용마루 기왓골이 비늘처럼 이어졌고

날아갈 듯 솟은 처마 빛나고 장하구나

옛 어른들이 미쳐 못한 일

조무(祖武)(3)를 이어받아 후손들의 올바른 길 열어 주고

자손의 앞날에 큰 희망 안겨 주네

이 재실 낙성하는 날이

곧바로 우리 종중의 옛날과 겹쳤구나

앞과 뒤 오른편 왼편에 금양(禁養)이 편리하니 소나무 가래나무 온둘레에 가득하고

먼데 가까운데 서울 시골 일가들의 친목이 더욱 두터우니 온 문중이 화기(和氣)일세

푸른 물이 강을 에둘러 흐르니 이것이 바로 옛 정자[錄水亭]의 이름이요,

고개 위의 흰 구름은[白雲] 이 또한 친사의 바람일세

서투른 솜씨나마 상량 노래 불러서

대들보 드는 힘을 덜어 주려네

어여차! 대들보를 동쪽으로 얼러라

고동산 좋은 기세 울울창창 둘러 있고

얼음처럼 맑은 물 청강공의 유풍일세

산 아래 시냇물소리 들을수록 좋을시고

어여차! 대들보를 남족으로 얼러라

동강봉에 서린 아물아물 아지랑이

옛날에 있던 집터 모두가 꿈이로다.

봄물이 흘러흘러 푸른 빛이 가득하다.

어여차! 대들보를 서쪽으로 얼러라

장안의 머나먼길 희미하게 보이는데

넋두리 싣고 몇몇 해 지냈더내

고국을 바라보니 한숨이 절로 난다

어여차! 대들보를 북쪽으로 얼러라

용문산 내린 줄기 구불구불 이어져서

음양이 고루고루 지덕(地德)이 모아져서

산도 태극인데 강 또한 태극일세

어여차! 대들보를 위쪽으로 얼러라

반달이 높이 솟아 처마 앞을 비추니

우리 가문 일어날 상징을 나타낸듯

선조의 끼친 음덕 그지없이 드리우리

어여차! 대들보를 아래쪽으로 얼러라

어허 우리 일가 후손들아

우리 집의 가훈(家訓)을 그대들도 알것이니

모름지기 선비 풍도 잊지 말고 빛내어라

엎드러 원하오니 이 재실 지은 후에 후예들이 번창하고 백성들이 안락하여 제사를 정성껏 받들어

연년이 대대로 천향하는 규모를 바꾸지 말고

묘역을 봉심하여 날마다 철마다 수호하는 절차를 어기지 말지어라.

청강공께서 돌아가신 지 349년 신미년(1931) 9월 30일

십일 세손 진사 원로 삼가 짓고 십이세손 박사 명세 삼가 쓰다.

 

<註>


(1) 임인(壬人) : 절조가 없고 아첨하는 사람

(2) 긍식(矜式) : 높이어서 본보기를 삼음. 矜은 敬, 式은 法

(3) 조무(祖武) : 선조의 남기신 공덕

 

伏以 旣刱造郋谷 俎效積久之忱 又肯搆於水回 庶伸承先之志 不遠其則永觀厥成 恭惟我淸江先公 世稱文武名臣 家傳忠孝 聖訓不顧 壬人讒舌之巧直在胷中 每切丙枕拊髀之嘆 恩追身後 且各郡矜式之多士旣有院宇之修 而吾宗感慕之諸孫 那無齋宮之建 所以有司之發論 允叶僉宗之詢謀 於是卜爽塏于淸溪之崖 爰得其所 胥新宇於封塋之下 不必他求 擇木材而繩尺隨宜斧彼鋸彼 量地形而基礎平正 鑿斯築斯 簡吉日於辰良測流景於坐 近鄰遠洞自來趍事 相與乎同人 上棟下宇就次告功 盖取諸大壯 房室之崇卑有序 足容尙齒惇行 堂厨之精灑 得冝 可以視毛告絜 念彼巧匠之運智 實由幹事者殫誠 屋瓦接以魚鱗苞矣茂矣簷桶儷於翬革 輪焉奐焉 述前代之未遑 英非繩其祖武 啓後昆之垂裕 亦是胎闕孫謨 惟玆落成之時 寔 乃修楔之日 左右前後之禁養便利 四山松楸 遠近京鄕之親睦尤敦 一門花樹 江回綠水 是所謂古亭之名嶺上白雲亦可爲親舍之望 庸陳短唱助擧脩樑

兒郞偉抛樑東 古東佳氣鬱葱葱 淸如淸水遺風在 山下溪流聽不窮 兒郞偉抛樑南東葛峰上媚晴嵐  綿惟遺址宛然夢 春水溶溶碧滿潭 兒郞偉抛樑西 百里長安日下述 泣說時危今幾載 瞻望故國不禁悽 兒郞偉抛樑北 龍門一脉來相得 己知地德合陰陽 山太極兮水太極 兒郞偉抛樑上 未圓月影簷前向 吾門福祿象方興 先蔭分明無限量 兒郞偉抛樑下 嗟我宗中後進者 詩禮家規君所知 須從文學尙儒雅 伏願 上樑之後 后裔蕃昌居民安樂 致敬祭事 勿替 年年世世薦享之規 奉審墓儀 無遠日日時時守護之絶

  公沒後三百四十九年 辛未 九月 三十日

      十一世孫 進士 元魯 謹撰

      十二世孫 博士 鳴世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