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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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png 법성공 휘 명용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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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적

선조 목록

 

*蔭職이란?: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의 의한 벼슬을 말함.

음통훈대부 김제군수(蔭通訓大夫 金堤郡守), 가선대부(嘉善大夫) 行 광진군첨절제사(法聖廣鎭軍 僉節制使) 경종신축(1721)~임인(1722) 사화시(士禍時) 몽와 김창집 영상(夢窩 金昌集 領相)과 道義의 契가 있어 流配所까지수행하여, 먼저 귀양을 보내고 뒤에 사약(賜藥)을 내림에 이르러 金公이詩를 지어 후사를 부탁한바 公이 夢窩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치렀더니,東人들이 夢窩의 처당(妻黨)이라 하여 黑山島 귀양 갔다가 갑진(1724)년에풀리어 돌아와서 벼슬하기를 단념하고 당진무수동(唐津舞袖洞)에 산장에서조용히사시다가 천수(天壽 77세)를 치(置)었다.

 

◇ 행적 목록 (숙종, 경종, 영조시대)(承政院 日記 抄)

서기

조 선

日辰

行 蹟

1

1711

33

숙종37년/12월/25일

己卯

李命龍 부사과(副司果) 관직을 제수함.

2

1717

39

숙종43년/07월/25일

丁丑

下直 廣梁僉使 이명룡...

3

1722

44

경종02년/09월/13일

乙未

전 僉使이명룡減死絶島定配(감사절도정배).

4

1723

45

경종03년/05월/13일

辛卯

檀讀 이명룡 罪錫恒曰 無可容貸矣...

5

1725

47

영조원년/01월/14일

癸丑

이명룡 母年六十一云...

6

1725

47

영조원년/02월/02일

庚午

이명룡 有老母로 出陸.

7

1725

47

영조원년/02월/04일

壬申

이명룡 전라도 全州府 出陸移配(출육이배).

8

1725

47

영조원년/03월/25일

癸亥

이명룡 放(방).

9

1725

47

영조원년/04월/02일

己巳

全州府 出陸罪人 이명룡.

10

1725

47

영조원년/05월/16일

癸丑

乍雨

副護軍이명룡單付(단부)=관원을 골라 제수

11

1725

47

영조원년/05월/16일

庚申

이명룡 爲→ 法聖僉使(법성첨사)을 除授

12

1727

49

영조03년/05월/29일

甲辰

大雨

법성첨사 이명룡 今加嘉善聚穀賙賑之功 제수

13

1728

50

영조04년/01월/10일

辛酉

법성첨사 이명룡 제수. (금가가선취곡주진지공)

14

1728

50

영조04년/05월/16일

丙寅

이명룡 四朔處冷之餘...(사개월 期餘)

15

1738

60

영조14년/01월/13일

丙寅

하직(下直)

 

1) 당진무수동세거(世居)의 全義人의 系譜

서기 1581년 (선조 14년 강계府使에 이어 嘉善大夫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벼슬을 하셨고 추증(追贈) 병조판서(兵曹判書)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이셨던 17世祖 청강공 휘 제신(淸江公 諱 濟臣)의 5대손으로, 1644(仁祖 22년) 21세에 과거 급제(武科 科擧及第)하시고 1662년(玄宗3년)용진 만호龍津 萬戶),

현종8년 6월 예빈별제(禮賓別提), 동년8년 12월 비인현감(庇仁縣監), 현종9년 자인현감(慈仁縣監)을 지내신 20세조 휘 행척(諱 行陟)의 손자로 무수동(舞袖洞)으로 낙향하신, 가선대부 행 법성첨절제사 김제군수(嘉善大夫 行 法聖 僉節制使 金堤 郡守) 22세조 諱 命龍 은 동지중추부사 장기현감(同知中樞府事 長鬐縣監)을 지내신 21세조 휘 만엽(諱 萬葉)의 아들로서 1679년 (숙종5년 기미)에 서울에서 출생, 1755년 (영조31년, 을해)에 당진 무수동에서 졸하시니, 그 수 76세였으며,

공은 유언하기를 “자손들에게 한수이북(漢水以北)을 넘지마라” 하셨다. 함은 후손들에게공(公)이 격었던 험난(險難)한 벼슬길이 아닌 조용한 선비의 길을 택하도록 하셨음일 것이다.

 

공께서 휘 팽세(諱 彭世)와 휘 팽수(彭諱 叟)와 두 아들을 두었으나 큰 아들 휘팽세는 19세때 졸(卒)하시니 그때가 1724년(경종4년 갑진) 김제공(金堤公)계서 흑산도(黑山島)에서 유배(流配) 생활하실 때 이니 그 애통(哀痛)함이 어떻 하셨겠나가히 짐작케 함이다. 23세조(世祖) 휘 팽수(諱 彭叟)께서는 휘 국배(諱 國培)와 휘 기배(諱 箕培) 형제 분을 두시고, 휘 국배(諱 國培)로 하여금 휘 팽세(諱 彭世)의 대를 잇게하니, 삼백여년간 면면(綿綿)히 이어지고 있는 김제공(金堤公)의 후손들이 오늘의 번성한 무수동세거全義人이 된 것이다.

 

2) 김제공(金提公)과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김제공 (諱 命龍)께서는

1711년(숙종37년) 12월 부사과(副司果)를 숙종43년7월 광양첨사(廣梁僉使)를 除授 받으시어 벼슬길에 있었고, 신임사화(辛壬士禍) 1721~1722년으로,1721(景宗1년)8월에 연잉군(延礽君: 후에 英祖)을 왕세자 (王世子弟 :경종)1년 8월) 책봉을 선두(先頭) 주창(主唱)하여 실행 시켰던 노론(老論)의 수장(首長)을 겪었고, 당시 영의정(領議政) 안동인(安東人)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이 다시 그해10월에 왕세자(王世子)의 대리청정 (代理聽政)을 상소(上疏) 하다가 소론(少論)의 인사들로 부터 “왕권교제를 기도한 역모”로탄핵(彈劾)을 받고 거제도로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이듬해(1722년4월)다시 무옥(誣獄)이 일어났는데, 김창집이 체포되어 성주(星州)에 이르자사약(賜藥)을 받고, 김공(金公)이 유배지까지 벼슬도 버리고 사사(私事)로이수행(隨行)하고 있었던 김제공(金提公)에게, 74세의 생을 마감하게 되는김공(金公)이 임명(臨命)의 詩를 써주었으니 그 중 일부 내용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몽와집권지사(夢窩集卷之四)〕 남선록(南選錄)

임명(臨命) 서증(書贈) 李命龍, 죽음을 임하여 이명룡에게 글 중.

수아입천극隨我入栫棘이험하고도 가시밭 같은 길

영해묘천리嶺海渺千里산 넘고 바다건너 이 수천리길

유자불상수有子不相隨자식도 따라오지 못한 곳까지 따라 왔구나,

홀문사아사忽聞賜我死갑자기 사약을 받고 죽게 되다니,

자연상아의自然傷我意자연도 슬퍼하는 듯하구나,

수골시이책收骨是爾責너에게 내 유골을 수습하게 하니

견이호차읍見爾號且泣너를 불러보고 또 눈물을 보이게 되는 나

면이차수루勉爾且收淚너는 눈물을 거두 거라

오아출원비吾兒出圓扉나의 아들이 살아 있거든

약위전차사若爲傳此事오늘의 이 원통함을 전해다오!

또한 金公은 遺書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한다.

如之子孫 不助吾之子孫 非如之子孫

너의 자손이 나의 자손을 돕지 아니하면 너의 자손이 아니고,

吾之子孫 不助如之子孫 非汝之子孫

나의 자손이 너의 자손을 돕지 아니하면 나의 자손이 아니리라.

 

당시의 정적(政敵) : 老論과 小論간에 치열한 파쟁(派爭)에 조선시대(朝鮮時 代) 문신(文臣)으로 노론(老論) 사대신(四大臣) 중의 한사람이요. 영의정 (領議政)였던 夢窩 김창집(金昌集)과 광양첨사(廣梁僉使) 이명룡(李命龍)간 의 義理는 목숨보다도 소중(所重)했음을 두 家門의 후손에게 보여줌은 물론이며, 의리와 아래위(上下)가 실종(失踪) 위기(危機)에 처해 있는 現時代사람들에 대한 지표(指標)가 아닐 수가 없다.

 

3) 이명룡(李命龍)에 대하여 낙향 안거지 由來碑造形物 요약정보.

1679(숙종5년)생~1755년(영조31년)졸, 本貫은 전의(全義) 자는 윤경(允卿), 咸鏡北道兵馬節度使 李濟臣 5代孫이며, 掌樂院正 李厚基 曾孫으로 漆原縣監李行陟의 孫子이시다.

1717년(숙종37년)광양 첨사 직에 있었고,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노론과소론 간에 당파 싸움이 극치에 달했던, 일어난 신임사화(1721신축년~1722년 임인년에 연잉군(延礽君: 후에 英祖)을 왕세자(王世子)로 성사(成事)시키고 또 대리청정을 주창하다 화(禍)를 면치 못했던 당시 영의정 安東人夢窩金昌集과의 연루(連累)된 친교(親交)로 인하여 김공(金公)의 거제도위리안치(圍籬安置)로부터 사사(賜死)되어 장례를 치르기까지 함께했던 바,이로(參考 夢窩集卷) 인하여 무옥(誣獄)으로 이어져 감사절도(減死絶島)로흑산도(黑山島)로유배(流配)되었다.

 

1725년 영조(英祖)의 등극(登極)으로 1월에 유배에서 풀리고, 9월에 법성 첨사(法聖僉使)직으로 1727년에 진휼(賑恤=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와줌)“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加資)되었고, 1728년(영조4년) 관직을 떠난후에 당진 무수동으로 낙향(落鄕)하여 여생(餘生)을 보냈다.

 

2000년 들어서면서 지역개발로 인(因)하여 옛날의 신선무수형(神仙舞袖形)지형지세(地形地勢)의 모습이 없어진 무수동(舞袖洞)에는 오늘의 “당진문예의 전당(唐津文藝의 殿堂)”의 자리를 하게 되었으며, 이명룡(李命龍)이 낙향(落鄕) 기거(寄居) 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된 유래를 기리기 위한 유래비조영물(由來碑造形物)이 2008년 12월에 唐津郡에서 설치하였다.

義理는 목숨보다도 所重했음을두 家門의 후손에게 보여줌은 물론이며,의리와 상하가 실종(失踪) 위기(危機)에 처해 있는 現時代 사람들에 대한지표 (指標)가 아닐 수가 없다.

 

4) 아래 가선대부 행 법성첨사 전의이공 휘 이명룡 낙향안거지

(諱 命龍이 落鄕安居地) 연원지 무수동 유래조형물(淵源地 舞袖洞由來造形物).

아래 글은 우리 조상의 陰德을 기리는 조형물에 기록된 내용 文이다.

무수동 세거 전의인 참판공파화수회에서 전의인 세거지로 마을의 지명유래 와 뜻깊은 우리 조상의 사연 등에 얽혀 유구한 역사의 한 장을 형성케 한 연원지(淵源地) 형태(지형)가 개발로 인하여 없어짐을 안타깝게 여겨 수년 동안 관계기관과 무수동 거주 他姓들과의 협의를 거처 왔던바, 민종기 唐津郡守의 思料깊은 결정으로 바로 “신선무수형(神仙舞袖形)의 우리 선조(先祖)묘소(墓所)” 자리였 던 “문예의 전당” 뜰에 2008년12월23일,군수민종기 김낙성 國會議員을 비롯하여 많은 지역 지도자들과 주민들 그리고참판공파 종중 강세(康世)회장을 비롯 10여명의 일가들이 참석한가운데 “무수동 유래 당진문예회관의 전당터” 造形物 제막식(除幕式)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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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동 유래조형물(舞袖洞 由來造形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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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유래조형물에 각인된 내용 문.

- 무수동(舞袖洞) 유래(流來)와 唐津文藝의 殿堂 터 -

이곳 당진문예의 전당 터(당진읍 교동리 동남 쪽)는 조선시대 신임사화(辛壬士禍) 이후 1729년에 낙향한 법성첨사(法聖僉使) 전의이씨(全義李氏) 이명룡(李命龍) 선생의 후손이 다섯 살 난 아들과 함께 움집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날 한 스님이찾아와 시주를 청하자 빈곤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정성어린 시주를 하였더니, 이에 감탄한 스님이 마을 중앙에 있는 안산(案山)에명당자리를 알려주었다. 지형지세가 신선이 춤추는 소매 자락형(神仙舞袖形)와 같이 자연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으로 소매가 눌리지 않도록 돌로 만든 묘비석(墓碑石)과 상석(床石)을 세우지 말라고 하였다.

이후 스님 말씀대로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살아 왔는데, 그 후손이 번창하여 8부자(富者)가 탄생했다고 하며, 이씨 후손들과 함께 김씨, 박씨, 안씨,최씨, 허씨, 홍씨의 성씨를 가진 40여호 세대 주민들이 근심 없이 평온하게 잘 살아왔는데 이 마을을 무수동(舞袖洞), 또는 “무시울” 이라 불렀다.오랜 세월이 흐른 뒤 2005년 무수동 마을은 당진읍내 지구 도시개발사업으로 인하여 도시로 지형이 탈바꿈하였다.원래 안산 터에는 현재의「당진문예의 전당」이 건립되어 춤과 노래 등 다양한 문화예술행사가 끊임없이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까지 전통적으로 이어온 고을로 후대에도옛 지명을 전하고자 마을유래를 담은 조형물을 세워 그 뜻을 기린다.

2008.12.23

당진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