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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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png 진사공 휘 현표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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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생원진사시 헌종(憲宗)14년(1848) 무신(戊申) 증광시(增廣試) 二等21位로 성균관 진사시(成均館 進士試)에 합격하시다.

수는 51세이시다.

 

휘 현표(諱 玄豹) 「進士試 入格(動機)」

전 광양첨사(前 廣梁僉使) 22세 諱 命龍 조선 19대 肅宗의 희빈장씨의소생으로 임금이 된 경종왕조에서 老,小論간 당파 분쟁으로 辛丑,壬寅사화당시 영의정(領議政)였던 몽와(夢窩) 안동인 김창집은 거제도 위리안치 되었다가 무옥(誣獄)으로 국문차 귀경길 星州에 이르러 사명(辭命)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金公의 동반 하였던 바, 僉使公 諱 命龍은 장사를 지내게되니 이에 또한 공께서도 夢窩(처당 : 처가집의 친인척)이라 하여 무고(誣告)로 죄인이 되게 하여 1722년 9월 黑山島로 流配를 당하게 되었다.

 

1725년 英祖大王의 등극으로 첨사공 휘 명룡은 방면되고, 법성첨사(종3품)로 제수(除授)되고 1727년5월29일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자(陞資)하였다.

1729년경 唐津 舞袖洞으로 落鄕 조용한 평생을 보내시고 공의 유언으로“내 손자들은 한강(漢江) 이북을 넘지마라” 는 뜻은 자손들이받들다보니, 계급 사회였던 당시 상황에서 3대동안 벼슬이 없는 가문은 자연적으로 양반가에 몰락에 접어들게 됨을 우려한 僉使公의 현손인 26세휘 현표(諱 玄豹)가 만년(萬年=오랜세월, 卒 5年前)임에도 불구하고 소과 진사시(小科 進士試)에 응시하게 되고 이에 進士試에 입격하셨을 것으로생각되며,

 

「절체절명(絶體絶命)에 처했던 무수동 세거 全義人 家門을 융성하게지속하게 했음을 물론이며, 後代에 적지 않은 무수동자손(堂內間14人)들이 벼슬 길에 오르게 되었다」.

 

지금은 우리 舞袖洞 全義人 後孫들은 옷깃을 여미고 다시 한 번 더 가선대부(嘉善大夫) 行 첨절제사 휘 명룡(僉節制使公 諱 命龍) 할아버지와進士公 휘 현표(諱 玄豹)할 아버지를 崇慕하고 흠모(欽慕)하여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