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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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png 지암공 휘 행진 묘

행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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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2리 무수동 문한산 산62-13 사좌

묘갈문

 

공의 성은 이(李)요 이름은 행진(行進)이며 자는 사겸(士謙)이요 지암(止菴)은 그 호이다. 전의인으로 고려 태사(太師) 도(棹)의 후예인데, 9대조의 휘는 정간(貞幹)이요 시호는 효정공(孝靖公)이며, 고조의휘는 문성(文誠)이니 병사요, 증조의 휘는 제신(濟臣)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북병사를 지냈으며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호는 청강이며, 조의 휘는 기준(耆俊)이니 승문 정자를 지냈고 좌찬성으로추증되었으며, 고의 휘는 후기(厚基)이니 장악원(掌樂院) 정(正)을 지냈고 이조(吏曹) 참판으로 추증되었으며, 비는 의령남씨이니 정부인으로 추증되었는데 도사(都事) 호(琥)의 딸이다. 공은 만력 정유년(1597)에 출생하였으니, 성장시기가 광해조때이었기로  과거 공부를 폐지하고 스스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지내다가, 계해년(1623)에 반정이 되자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파방이 되었고, 다음해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동궁 세마에 보직되었다가 부솔로 옮기었는데 말을 잘못한 실수로 재상에게 미움을 받아 특명으로 파직되었다. 을해년(1635)에 좋은 성적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과 촉망이 한 시대를 누릴만 하였다. 중국 사신 황(黃) 감군(監軍)이 우리나라에 오게 됨에 즈음하여 접반사(接伴使)가 되었으니 매우 엄격한 선발이었다. 그러나 왕께서 전일의 말썽이 난 일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가 이로 인하여 취임하여 일을 보지 못하였다. 공조(工曹)의 낭관을 거쳐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막료로 있다가, 무안(務安)ㆍ김포(金浦)의 수령으로 임명되었고, 병술년(1646)의 중시에 급제하여 군자감 정正으로 승진되었더니 효종께서 동궁으로 드시어 문학에 능한 사람을 골라 관료로 등용하게 되었는데 공이 우두머리로 뽑히었다. 이때로부터 필선과 보덕을 겸하고 여러번 수찬 교리 응교 검상 사인을 거처 사간원 집의(執義)로 옮겼다가, 통정대부로 승진되어 승지로 임명되었고, 이어 형조의 참의를 거쳤다. 효종초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치고 문신만 응시하는 정시庭試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되어 우윤이 되었고, 형조ㆍ이조의 참판을 거쳐 도승지ㆍ대사헌을 지냈으며, 왕께서 장차 특별히 발탁하여 쓰려 하였는데 또 실현되지는 못하였고, 무술년(1658)에 송도 유수로 나가 있었는데 기해년(1659)에 효종이 승하하시고 현종이 즉위하셨는데 공은 이미 늙었음으로 병조ㆍ호조ㆍ예조의 참판을 거쳐 경기 감사를 지내고, 을사년(1665) 9월 9일에 세상을 떠나니 수가 69세이었다. 부인은 정부인 전주이씨이니 장령 진빈(軫賓)의 딸인데 회덕이 높았으며, 공보다 두살이 아래고 공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만에 별세하였다. 2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 만상(萬相)은 통덕랑이고, 만동(萬東)은 사도시 정(正)이며, 사위는 판윤(判尹) 구일(具鎰), 현령 김명석(金命碩), 박세남(朴世楠), 부사 김여남(金汝南)이다. 통덕랑 만상(萬相)도 아들 형제 딸 4형제를 두었는데 아들 신룡(臣龍)은 목사(牧使)이고, 종용(從龍)은 생원이며, 시정(寺正) 만동(萬東)은 딸만 6형제를 두었고 측실의 몸에서 난 산룡(山龍)은 첨사를 지냈고, 전용(田龍)은 동지를 지냈다. 목사 신룡(臣龍)의 아들 덕로(德老)는 현감을 지냈고, 생원 종룡(從龍)의 아들 덕윤(德潤)은 진사이며, 덕로(德老)는 아들 춘배(春培)가 있고, 덕윤(德潤)은 아들 인배(仁培)ㆍ원배(遠培)가 있으며, 외손ㆍ증손ㆍ현손이 100여명이나 된다. 공의 묘는 양주의 문한산(文翰山) 무수동(無愁洞) 사좌(巳坐)의 언덕에 있는데 부인을 부좌(蟄左)하였다.

 

대체로 공은 큰 재주와 높은 학식으로 일찍부터 선비의 촉망을 받았으며, 주연(胄筵)ㆍ(서연書筵 : 왕세자가 독서하는 자리) 자리에 출입하면서부터 효종대왕의 지우(知遇 : 인품을 알아 줌)를 받았으나, 머리털이 희여지자 벼슬길이 기구하여 작위는 마침내 그 덕행에 알맞게 높아지지는 못하였으니 어찌된 까닭인지 알 수 없는 일이며, 또 묘에 비석과 명각이 없었으니 또한 운명이던가? 목사군이 후일에 고증자료(考證資枓)가 없어질 것을 걱정하여 조그마한 비석을 세우려 하는데 상덕은 그 집의 통가 후생으로 친밀히 지내는 사이의 집 후배으로서 공의 덕을 사모하는 사람이더니 외람되게 음기를 부탁받으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삼가 위와 같이 서술하였다. 공의 높고 깨끗한 성품과 곧고 큰 기상이 속세를 떠나서 우뚝하게 홀로 서 있어서 한 시대의 흠모를 받은 바가 있으니, 뒷 세상에서 선비를 논평하는 자리에서 반드시 공의 사적을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글을 완성하고 나니, 목사공이 홀연히 별세하여 입석하는 일을 끝맺지 못하였더니, 현손 인배(仁培)가 비석에 각자하여 비로소 세웠다. 춘배(春培) 현손(玄孫)은 계자(繼子)가 있으나 어리고, 인배(仁培)는 지금의 관직이 대사간(大司諫)이며, 그 이들 양회(良會)는 상상(上庠)에 들어갔고, 원배(遠培)는 관직이 현령(縣令)이며, 아들 영회(英會)가 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관(弘文館) 부응교(副應敎) 지제교(知製敎) 임상덕(林象德)이 지음

 

 

 

 

 

止菴公 諱 行進 墓碣文

 

公姓李諱行進○字士謙○止菴其號○全義人○高麗太師棹之後○九代祖諱貞幹諡孝靖○高祖諱文誠兵使○曾祖諱濟臣文科北兵使○贈領議政○號淸江○祖諱耆俊○承文正字贈左贊成○考諱厚基掌樂正○贈吏曹判○騙宜寧南氏○贈貞夫人○都事諱琥女○公以萬曆丁酉生○當光海世廢擧自放○癸亥改玉○魁進士罷榜○明年中生員補東宮洗長○轉副率○以語失惡宰相特罷○乙亥擢文科○聲望伏一時○詔使黃監軍之來○爲接伴事極選也○然上記前事○抑不用○由工曹郞佐畿幕○宰務安金浦○中丙戌重試○陞軍資正○及孝廟入東宮妙選文學○備弓僚○

公首鷹焉○由是兼弼善輔德○累歷修撰校理應敎檢詳舍人司諫執議○陞通政○拜承旨○歷戶禮兵刑議○孝廟初元丁外艱服局○中文臣庭試○拜大司諫○未幾特陞嘉善○拜右尹○歷刑吏判○都承旨○大司憲○若將以眷用○而己又不果○戊戌居留松都○己亥孝廟升遐○顯廟卽位○公益老矣○爲兵戶禮判京畿監司○乙巳九月卒○壽六十九○配貞夫人全州李氏○掌令軫賓之女○甚有婦德○生少公二歲○卒後公二十一年○有二男四女○男萬相通德郞○萬東○司導寺正○女具鎰判尹○金命碩縣令○朴世楠金汝南府使○通德二男四女○男臣龍牧使○從龍生員○寺正六女○側出男山龍僉使○田龍同知○牧使男德老縣監○生員男德潤進士○德老男春培○德潤男仁培遠培○外曾玄殆百餘人○公墓在楊州文翰山無秋洞巳坐原○夫人蟄左○盖公以環材卓識○夙負士望○自出入胄筵○結寧陵深知○而白首釜崎○位施竟不究其行尼○孰使然歟○墓無顯刻○亦治命也○牧使君懼後無徵○謨竪短石○以象德贊通家後生習慕公者猥屬以陰記○不敢終辭○謹次如右○若其峻潔之韻○直大之氣○有以離俗○獨立而見慕於一時者○後之尙論之士○必有能言之者矣○文旣成而牧使公旋下世○遂未及就○玄孫仁培刻石始竪○春培有繼子幼○仁培官今大司諫○子良會等登上庠○遠培官今縣令○子英會通訓大夫○弘文館副應敎知製 敎林象德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