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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군수 휘 덕린 비 |
금산군수 이공 덕린 비
금산군수 이공 휘 덕린 묘비명과 서문
우리 이(李)씨는 고려 태사(太師) 도(棹) 이후로 충절의 재상으로 8백여 년을 이어 내려 왔는데 근세에 이르러 운이 쇠하여 관계에 들어가서 우수한 이름을 떨친 이가 적었는데 오직 나의 삼종제(三從弟) 덕린(德鄰)이 기질이 중후하고 기품이 헌상(軒爽)하여 집에서는 효도를 다하고 비록 과장에는 나가지 않았으나 관계에 진출하였으며 모든 법도를 깊이 알아서(可爲浚法) 기울어가는 집안의 명성을 떨칠 만 하였는데, 불행하게 나이 겨우 49세를 일기로 끝마치니 천운이 우리 집을 폐하는 것은 아닌지, 아- 슬프도다.
군은 자(子)를 자방(子芳)이라 하고 목릉(穆陵)조(朝)의 명신, 이름은 제신(濟臣)이라고 하시며, 문무(文武)촌관(寸官) 북도(北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내시고 영의정에 추증되고 호(號)를 청강(淸江)으로 삼덕(三德)을 전하신 분의 후손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행원이시고 의정부 우의정을 지내고 효정(孝貞)의 시호를 받으시었고, 조부의 이름은 만최(萬最)이시고 사옹원(司饔院) 봉사(奉事)를 지내시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징해(徵海)이시고 원주(原州)목사(牧使)를 지내시었는데 해평(海平) 윤씨(尹氏) 윤전(尹塼)의 따님을 배필로 맞으니 공의 어머니가 되신다.
공이 관계에 입문하여 장릉(章陵)참종(參奉), 사재감(司宰監) 봉사(奉事), 장악원(掌樂院) 직장(直長), 한성부(漢城府) 참군(參軍), 빙고(氷庫) 별제(別提),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 충훈부(忠勳府) 도사(都事), 돈녕부(敦寧府) 주부(主簿) 판관(判官), 외직(外職)으로 영천, 안산, 금산 3군 군수 역임, 그 고을을 번영하게 하였는데, 금산군민이 송덕비를 세우고 선정을 칭송, 제방을 쌓아서 군민을 이롭게 하였으므로, 지금도 그 제방을 이공제(李公堤)라고 부르고 있다. 신해(辛亥)년에 금천에 있는 그 형의 임소에서 2월 21일에 작고하여 안산 양등촌(楊登村)에 안장하였다가 정사(丁巳,1737)년에 양주 성산리 임좌(壬坐)로 천장(遷葬)하였다.
공은 진실하여 거짓이 없고, 궁하고 빈한한 사람을 도와주는데 돈독하여 옛 현인의 풍모가 있으므로 원근 종족과 친지들이 다 함께 칭송하였다 배위는 경주 김씨 돈녕(敦寧)부사(府事) 경은(慶恩)부원군(府院君)으로 칭송받는 주신(柱臣)의 딸이다. 자식이 없어 족형 덕연(德淵)의 아들 후배(厚培)로 대를 이었는데 후배 역시 군의 복중에 사망하였으니 더욱 슬픈 일이로다. 김(金) 숙인(淑人)이 현숙하여 군의 후사를 잘 다스리었고 군의 묘비를 세우려고 비문을 나에게 부탁하니 내가 지난날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지난 기유(己酉,1729)년 봄에 군이 나의 집 수회촌(水回村)을 찾아와서 밤에 한자리에서 자게 되었는데 군이 말하기를 나는 고질병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군의 자품이 넉넉한데 어찌 그런 불길한 말을 하는고 하니, 군이 다시 말하기를 내 병이 심하니 어찌 하리요 하여, 내가 거듭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과연 군이 나보다 앞서가니 내가 덕이 부족한 탓일까?
군자의 무덤이여 슬프고 슬프도다. 명에 이르기를 밖으로는 산과 같이 드높고 안으로는 어리석음 같았네, 지난날 관계에 우리 종중 빛 날렸고 생을 마침에 그때가 다시 그리워라, 이치에 어긋나니 누구를 책망하리.
삼종형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과 대제학 지 성균관 동지 경연 춘추 관사 세자 좌(左) 부(副) 빈객 덕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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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山郡守 李公 諱 德鄰 墓碑銘 幷序
吾李氏自高麗太師棹以後忠冠冤相承八百餘秊矣感極而衰至近世無論策名入朝者絶少卽頭角嶢然爲後出秀亦鮮其人惟吾族弟德鄰資重厚而氣則軒爽在家孝於親雖不由科第進而其莅官設施皆可爲浚法若可以振旣之頹家聲而竟年四十九而沒殆天之廢吾宗嗚呼其可惜也君字子芳在穆陵朝有諱濟臣以文武寸官北道兵馬節度使 贈領議政號淸江三德傳而有諱行遠議政府右議政贈諡孝貞生諱萬最司饔院奉事生諱徵海原州牧使安海平尹氏庶尹 塼女是爲君考妣君始官爲章陵參奉歷司宰監奉事掌樂院直長漢城府參軍氷庫別提義禁府忠勳府都事敦寧府主簿判官外則守榮川錦山安山三郡榮錦民皆竪碑頌君政而榮有君所築 堤利伋民甚博至今稱爲李公堤云辛亥卒於其兄金川任所二月二十一日也始葬安山楊登村丁巳遷窆于楊州城山里壬坐之原君眞實無僞篤於行誼恤窮焉難有古人風遠近宗黨一口稱之娶慶州金氏頌敦寧府事慶恩府院君柱臣女無育取族兄德淵子厚培爲後厚培亦死於君服中益可悲也金淑人治君後事甚怷又將竪碑君墓而敎文於余尙記己酉春君訪我於水回村夜連枕君忽謂余曰吾病已痼恐不能久於世余曰君資禀 可遽出此不詳語君復曰病痼矣其奈何余重加慰勉而罷豈意君果先余死而余以不腆之君之墓也哉悲夫悲夫銘曰嶷嶷其外芚芚其中 昔者攸期光揚吾宗 終鍛蜚始畀曷豊 在理甚舛莫詰冥 淑人治碣宗兄之銘
三從兄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 經筵春秋館事世子左副賓客德壽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