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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목사 휘 영배 비 |
황주 목사 휘 영배 묘비
묘비문과 서문
삼한에 으뜸가는 6성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이씨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정벌하기 위하여 금강에 이르러 홍수로 더 나아갈 수 없게 되자 묘책을 올려 도강에 성공하자 태조 왕건이 고마워서 성씨를 물어보고 이름을 도(棹)라고 지어주어 개국공신으로 대대로 고관대작에 오르게 되었고 조선조에 이르러서 효정(孝靖)공 정간(貞幹), 평간공(平簡公) 예장(禮長)이 명덕으로 국사(國師)에 오르고 청강(淸江)선생 제신(濟臣)이 문장과 절행(節行)이 특이(特異)하였고 그의 증손 인조명신(名臣) 우의정 효정(孝貞)공 행원(行遠)이 중흥(中興)현신(賢臣)으로 명망 높은 재상인데 이 분이 바로 영배(永培)공의 고조부이시고 증조의 이름은 만최(萬最) 사옹원(司甕院) 봉사(奉事) 조부의 이름은 징해(徵海) 상주목사 아버지의 이름은 덕린(德鄰) 금산군수, 어머니는 경주 김씨 경은부원군 효간(孝簡)공 주신(柱臣)의 딸이다. 아버지 군수공이 자식이 없어 조카인 영배(永培)공을 입양하였다. 생가의 조부는 나주목사로 이름은 징즙(徵楫)이요 생가의 부친은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으로 이름은 덕봉(德鳳) 생모는 반남(潘南)박씨 참찬(參贊) 태항(泰恒)의 딸이시다.
공의 이름은 영배(永培) 자는 구지(久之)시고 영조 경술년(1730) 12월 21일생으로 총명준수 비범한 장로(長老)의 기량이라 계유(癸酉,1753)년에는 은혜를 입어 장녕전(長寧殿) 참봉이 되었는데, 이 때에는 어머니 김 숙인만이 생존하시니 영조께서 동기간처럼 위로하여 주시었다. 갑술년(1754)에 동보봉사로 승진하였는데 이 때에 액예(掖隸)의 직책을 가진 사람이 공의 빠른 출세를 시기하여 세력을 믿고 송사를 일으키니 공이 이를 국법으로 곤장을 쳐서 다스리니 부내가 숙연하였다. 을해(乙亥,1755)년에 제용감(濟用監)으로 제수되고 다음 해에 직장으로 승진 이어서 정(丁)참봉(參奉)이 되어, 기묘사화 같은 것을 우려하기도 하였다. 인현왕후를 조요에 모시는데 감시관도 하고 승진하여 빙고(氷庫)별제(別提) 옮겨서 장악(掌樂)주부(注簿), 의금(義禁)의빈(儀賓)도사(都事) 임오년(1762)에 제천현감으로 나가 3년 만에 읍민이 편안함을 칭송하였다. 을유년(1765)에 다시 제용감(濟用監)주부(主簿), 종묘(宗廟)서령(署令), 병술년(1766)에 안성군수를 역임 수년에 덕이 이웃 고을까지 미쳤는데 그 때에 군내의 신귀(新貴)라는 사람이 교만하고 자랑이 심하여 공이 이를 호노(豪奴)와 같이 대아니 신귀(新貴)가 부하를 시켜서 용서를 빌어 공이 방백의 권한으로 다스렸다. 경인(庚寅,1770)년에 장원별제(掌苑別提) 다시 현릉령(獻陵令), 신묘(辛卯,1771)년에 특진하여 황주(黃州)목사(牧使)로 부임하였다. 황주가 양쪽 고을의 중간에 있고 수부(帥府)의 관할 하에 있으니, 지방도 넓고 중요한 일도 많았으나 일을 여유롭게 처리하고 송사를 간편하게 하고 군적을 바로 잡고 관사와 창고를 개선하고 불필요한 제도를 바로 잡으니 주민이 편안하였다. 그 때에 가뭄이 심하여 기우제를 지내게 되었는데 공이 하필 종기의 질환이 심하여 활동을 못하게 되어서 고을의 관리들이 주인을 교체할 것을 청원하니 공이 말하기를 민의가 따가우니 어찌 민의를 따르지 않으리오 하고, 곧 수레를 타고 숙춘(宿春)의 땅에 이르러 정성으로 지원하여 상의 허락을 받으니 경내에서 감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얼마 후 집에 돌아와서 문을 닫고 나가지 않고 친구들과 술을 즐기었다. 정조 을해년(1779)에 질병이 악화되었으나 의식은 맑아서 제사절차와 가사의절을 써놓고 드디어 十월 九일에 생을 마치니 겨우 오십(五十)세였다. 십이월에 서교 성산리 계좌에 장사 지냈다. 공은 외모와 성품[姿性]이 순후(淳厚)하고 기량과 법도[器度]가 평탄하였다. 그 때에 모친 김 숙인이 정성스런 요양[忠養]을 다했는데 일찍이 부군을 잃은 아픔(未亡之痛) 속에서도 의연히 말하기를, 단 하나인 나의 아들과 며느리가 있으니 아들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 하리요 하였는데 일을 당하니 너무나 애절하고 장사의 예절을 지나치도록 다하니 다들 감탄하였고 조상을 받드는 일 친족을 돌보는 일을 정성스럽게 하였다. 중씨가 있었는데 현명하나, 공사에는 나가지 않고 형수를 존경하고 조카딸을 잘 키워서 그 딸이 성장하여 사람을 사귀는데 자유로웠고 예쁘다고 칭찬하는 사람을 치사하게 생각하고 재난을 당하는 사람을 극력 도와주고 적은 권력을 믿고 공과 친척인체 하는 사람을 받아 주지 않고 저쪽에서 위세를 부려도 의연히 물리치니 다들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영배공은 나와 젊은 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냈는데 위인이 관대하고 도량도 넓었었다. 내가 서(西) 절도사(節度使)로 있었는데 공이 황주목사로 와서 내가 황주를 지날 때에 들려보면 행정이 관대하고 진취적이라서 고을이 평안하였고 나를 만나서 술병을 들고 태허루(太虛樓)에 올라가서 우정을 즐기고 멀리 강산을 바라보면 심신이 쾌락하여 천사 같은 기분이었는데 다만 누각(樓閣)이 오래되어 기둥이 상하기도 하여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염려하였는데 명공이 누각(樓閣)을 수리하고 단장(丹粧) 하였으므로 내가 그 사연을 벽에 써서 걸어 놓았다. 내가 임기가 다하여 돌아왔는데 그 후에 여러 번 황주 강산을 지날 때에 그 누각(樓閣)이 그림 같이 아름답게 서있는데 지금은 공이 보이지 않으니 창연함을 금할 수 없다. 지금 공의 장자 대간공과 차자 진사공이 나를 찾아와서 비문을 부탁하였는데 자상하고 검소하고 지덕과 예의를 갖추었으니, 가히 공의 후계라고 감동하였다. 숙인 연일(延日) 정씨는 흥양(興良)의 딸이요 관찰사 시성(始成)의 현손이라 공보다 2년 후에 출생하였고 공이 작고한지 이십(二十)년에 아들과 사위들이 다 관직에 올랐고 세칭 현숙(賢淑)양모(良母)로 덕행이 현숙하여 천륜을 지키는 일, 조상을 받드는 일, 근검(勤儉) 치가(治家)로 어진 자손들이 뜰에 가득하니 공이 못다한 규문(閨門)을 덕성으로 채우니, 자녀가 이남 삼녀로 장자는 문회(文會) 대사간(大司諫)이요, 이남은 형회(亨會) 진사요, 장녀는 군수 정치우(鄭致愚)에게, 이녀는 좌랑(佐郞) 박종유(朴宗維)에게 삼녀는 윤택열(尹宅烈)에게 출가하였다. 장남 문회 대간공이 일남 일녀를 두었고 이남 형회 진사가 형제를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명에 이르기를 부모를 섬김에 공경을 다하고 입신출세에 근심하는 바 없고 관직 생활에 게으르지 아니하고 촉박한 일에도 여유롭게 비록 장수는 못했으나 많은 복을 스스로 얻고 의로운 늪에서 명공의 혜택이 흐르고 황주 누각(樓閣)에 공적이 남아있네 지금의 자손에게 아름다운 경사 유유히 넘쳐서 큰 역사가 천세에 드높으리. 보국 숭록대부 행 판중추부사 겸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지 경연 춘추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세자좌빈객 홍양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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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州牧使 全義 李公 永培 墓碑銘 幷序
三韓之甲姓六而李居其一李有三貫而全義居一高麗太祖征甄萱渡錦江有艤船待者問其姓錫名棹遂策開國勳世襲高官至 本朝有孝靖公貞幹平簡公禮長名德載國乘有淸江先生諱濟臣文章節行爲 穆陵名臣其曾孫右議政孝貞公諱行遠淸名雅望爲中興賢相是爲公高祖也曾祖諱萬最司饔院奉事祖諱徵海尙州牧使考諱德鄰錦山郡守妣慶州金氏慶恩府院君孝簡公柱臣女郡守公無育公以堂姪入爲後羅州牧使諱徵楫 慶基殿參奉諱德鳳卽公本生祖考考也本生妣潘南朴氏左參贊泰恒女以英祖庚戌十二月二十一日生公公諱永培字久之聰俊異凡長老器之癸酉以 恩除 長寧殿參奉蓋金淑人纔卽世 英廟欲以慰 東朝孔懷之情也甲戌陞東部奉事有掖隸屈於訟而祜冒肆惡亟禠其紫杖之如法部內肅然乙亥摠濟用監翌年序陞直長巳而參奉公憂己卯 仁元王后祔廟差監造官陞氷庫別提轉掌樂主簿義禁儀賓都事壬午出監堤川縣三載峽邑官民俱安以微事罷歸乙酉復濟用監主簿移 宗廟署令丙戌出守安城郡踰歲有治達四隣之褒郡有新貴張甚公旣不能禮囚其豪奴而刑之新貴爲亞使慫惠方伯治中考遂解歸庚寅除掌苑別提轉 獻陵令辛卯 上特賜恩對仍 命陞敍遂拜黃州牧使黃間於兩面西之交官居師府之下冠盖旁年地大事殷公處之裕如簡獄訟正軍籍繕廨宇革倉剩之謬增官貿之直吏民咸便之時早禱雨公適患腫不能動將吏交謁請替朁行公曰民命棘矣寧恤身耶卽輿往宿春之地虔誠露禱果獲冥賜一境莫不感頌瓜近解歸閉門不出以朋酒自娛 正宗乙亥感疾革呼寫祭儀及家事數百言神識不亂竟以十月九日終壽僅五十臘月葬于西郊城山里癸坐之原公姿性和厚器度坦易事金淑人盡其忠養淑人常抱未亡之痛而見輒怡然曰吾有嘉兒嘉婦奚羨人之多男乎及喪哀毁踰節莭致動內使之臨饋葬祭盡禮人皆感歎推以至於奉至於奉先收族皆出誠悃仲氏賢而無年公事孀嫂甚謹撫孤女成立與人交傾倒無城府見人側媚之態視之若浼有橫罹無辜者極力周恤時有逆戚恃勢粥權者與公有姻戚之好要與相欸 而終不應彼乃脅持不已而毅然不動人以爲難公少與吾弟遊雅喜其有大家觀度及余按西海節莭公來牧黃州每行部到黃見其爲政寬綽桭勵不負平日所知遂携酒登太虛樓驩然道舊故愛其江山曠爽棟宇軒敞緬想天使之流憩而獨恨 楹桶陊朽懼玆樓之不能久矣余解歸之明公修葺一新走書告成余樂爲之記俾揭于壁其浚屢持節過黃江觀其經規畵宛如昨日而公不待矣未嘗不愴焉興思今公胤子大諫君兄弟具公言行來乞樹墓之辭詳而不繁直而不華淂狀德智體公可謂有後矣余於是重有感焉淑人延日鄭氏興良之女觀察使始成之玄孫也生先公二年歿後公二十年及見子婿皆通籍入朝世稱淑媛而賢母蓋其德器莊溫質行根天在家爲孝女適人爲令妻奉先以敬訓子以義儉於治家厚惇親克亨遐齡子孫盈前人謂公之不盡之起報閨門之德與有助焉擧二男三女長文會大司諫次享會進士女長歸郡守鄭致愚次歸佐郞朴宗維次歸士人尹宅烈大諫一男一女進士二男皆幼銘曰 事親則僾然其慕立心則坦乎無憂 居官則遇剛不吐急人則無因不收 世方靡於齪齪我獨處以休休 雖長年之未執盖多福之自求 義林之藪公澤所流黃岡之樓公蹟所留 今嗣提美餘慶悠悠 太史之辭天歲之丘
輔國 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 兼 吏曹判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世子左賓客 洪良浩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