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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공 휘 중기 약전 |
공의 諱는 중기(重基)요. 자(字)는 자위(子威), 호(號)는 석강(石江) 또는 물관재(勿關齋)이다.청강공의 長孫子로 선조 신미년(1571) 12월5일 戊時에 부훤공(諱 耆俊)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하시었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광주김씨로 監役 익휘(益輝)의 따님이시다.
신축(辛丑 1601. 선조34)에 사마시(司馬試, 生員)에 올라 태학(太學, 성균관)에 유학(留學)하였으며. 상국(相國) 이정귀(李廷龜)가 전형(銓衡)을 잡고 추천하여 금오랑(金吾郞)에 제수되었고 내섬시(內贍寺)의 직장(直長)에 전보되었는데, 계축년의 어려움을 만나 10년을 좌폐(坐廢)되었다. 계해년 개옥(改玉, 인조반정)에 다시 호조좌랑이 되었고 신계현령(新溪縣令)에 나갔으나 그 해(갑자년 1624 인조2년) 11월7일에 임소 관사에서 별세하시니 향년 54세이시다 .
공께서는 나이 13살에 고자(孤子)가 되었는데, 상례(喪禮) 치르기를 성인(成人)과 같이 하였고 슬퍼하는 모습과 곡하는 소리는 능히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반드시 능히 그 가문을 떨칠 것이다.”고 하였다. 집에 들어가서는 청상(靑孀)이 된 어머니를 받들어 어기지를 않았고 집을 나가서는 제부(諸父) 섬김을 아버지 섬기는 것 같이 하였으며, 물러가서는 아우와 같이 책을 읽고 행실을 신칙했으며 방에 앉으면 자리를 같이 하고 나가면 수레를 함께 탔으며 풍채(風彩)가 서로 비취니 세상 사람들이 연벽(聯璧)이라 칭하였다.
어린나이에 고자(孤子)가 되어 중부(仲父) 지범공(志范公)이 공을 끌어내서 가르쳤으니 뜻을 합하고 언약을 지키도록 해서 모두 수립(樹立)한 바가 있었다. 중부(仲父) 지범공(志范公)이 봉사(奉使)로 국경을 넘어서 귀국길에 황해도 봉산의 여관에서 운명(殞命)하였을 때에 공께서 부츤(扶櫬)하여 반장(返葬)하니 복상(服喪)에 참담함을 삼켰고 고달품은 간극(艱棘)과 같아 군자(君子)도 어렵게 여겼다.
공께서는 신계현령(新溪縣令)으로 있은 지 한 달이 채 안되어 별세하였으나, 현(縣)의 백성들이 공의 은덕을 기리어 비(碑)를 세웠다.
후에 둘째 아들 서화공 (諱 行遠)이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되었기에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 홍문관 에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兼 領 經筵 弘文館 藝文官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師)에 추증 되시었다 .
配位는 풍천임씨로 典簿公 색(穡)의 따님이시니 封 貞敬夫人이시다.
묘소는 양평군 서종면 수릉리로 양위 合窆이시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이 묘갈문을 짓고 명(銘)을 엮으니 다음과 같다.
산은 높고 내는 깊어 /山高川深
어느 누가 그의 덕을 알겠는가! /孰識其德
정녕 혼백과 더불어 없어졌으니 /寧與魄朽
새겨 쓴 것이 비석이 아니라네. /可泐非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