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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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png 효헌공 휘 호민 행적

행  적

선조 목록

 

1762년(영조 38)~1823(순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학여(學余) 대사간 덕부(德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원배(元培)이고, 아버지는 단회(端會)이다. 어머니는 정택빈(鄭宅彬)의 딸이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1801년(순조 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02년(순조 2)

홍문록(弘文錄) 5점을 받았으며,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

1803년(순조 3)

교리(校理)로 제수

1804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특진

1805년

대사간 제수

1806년

이조참의(吏曹參義) 제수

1806년

 

황해감사(黃海監司)로 재직하면서 신천(信川)과 재령(載寧) 지역의 침수 민가가 61호였음을 보고하였다.

1808년

이조참의(吏曹參義) 제수

1809년

승지(承旨)를 역임

1810년

이조참판 제수

1811년

강원도관찰사로 파견

1813년

대사간 제수

1814년

대사헌과 이조참판을 역임

1815년

제조를 지내다가 가의대부(嘉義大夫)가 가자(加資)되었다. 그 해 정경(正卿)이 되었으며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대사헌, 공조판서(工曹判書), 좌참찬(左參贊)을 두루 역임

1817년

이조판서 제수

1818년

대호군(大護軍)과 좌참찬을 역임

1819년

대사헌으로 활동

1821년

진주정사(陳奏正使)로서 청나라에 파견

1822년

우참찬·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형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

1823년

좌참찬·판의금부사, 형조판서로서 재직하면서 서얼(庶孼)을 허통(許通:관직에 등용될 수 있도록 법적으로 허용함)해 주어 서얼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나아가 인재를 모두 등용, 국가 발전의 기반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함을 주장

 

강원도기념물 제 24호 철원토성및석조물(鐵原土城및石造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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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강원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 273-3외 1필, 군탄리 902-4

지정일  1977. 11. 28

수량/면적   일곽/5990

 

★ 토성리 마을의 밭을 둘러싸고 있는 흙으로 쌓은 성과 군탄리 마을의 옛 풍전역터에 놓여 있는 직육면체의 석조물이다. 점토를 이용해 직사각형으로 쌓아올린 이 성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평탄한 곳에 설치되어 있다. 원래는 제법 큰 규모의 성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3면의 성벽이 없어지고 한쪽면의 성벽만 남아있다. 성안에는 당시의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 흔적이 남아 있고, 무늬 없는 토기 조각이나 석기 등이 발견되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청나라의 장군 마부대와 용골대가 하룻밤 사이에 이 성을 쌓았다고 하나 전혀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일 뿐이다. 받침대 위에 놓여 있는 직육면체의 석조물은 옆의 4면에 ‘□□□순찰사 이공호민 익영대(□□□巡察使 李公好敏 益詠臺)’라는 글씨를 큼지막하게 새겨 놓아, 이호민을 기리고 있는 표석으로 보인다. 이호민은 조선 순조 1년(1801) 과거에 급제하여 그 이듬해에 어사가 되었고,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의정부참의를 지냈던 인물로, 순조 11년(1811) 강원관찰사에 임명되어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는 부패된 정치와 어지러운 민심으로 곳곳에서 난이 일어나고, 흉년까지 겹쳐 어려움을 당하던 때로, 이 관찰사는 힘을 다하여 민심을 살펴 잘 다스리고 백성들을 고루 구제하는 등 많은 업적을 베풀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생전의 그의 은혜를 잊지 못하던 이 고장 사람들은 서울과 서북을 통하는 중요한 길목인 이곳에 그를 기리는 표석을 세워두었는데, 오늘날까지 이렇듯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호민의 생애로 보아 1800년대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비각을 세워 그 안에 모셔두고 있다. 성벽은 전체 길이가 약 1㎞이나 경작 등의 인위적인 파손과 재료의 취약점으로 인하여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성벽의 잔존한 높이는 10m이고, 하부너비 약 9m, 상부너비 약 4m이다. 농경지로 개간하면서 성벽의 흙을 운반하여 가서 현재는 서벽 약 150m, 남벽 10m, 높이 5~6m 가량만 남은 상태이다. 성벽의 전체적인 평면구조는 방형(方形)이고 평지성(平地城)인 점으로 보아 읍성(邑城)의 성격이 짙다. 성내에서는 무문토기편과 석기류 등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서 축성되기 이전에 주거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사시대의 축성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며 축성법으로 보아 삼국시대 또는 그 후대에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 장수 마부대(馬夫大)와 용골대(龍骨大)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침공하였다. 이때 평안관찰사(平安觀察使) 홍명구(洪命耈)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유림(柳琳)이 포위하고 공격하자, 청나라 군대는 하루만에 성을 쌓은 것이 이 성곽이라는 전설이 있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쌓은 것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