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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공 휘 행도 묘 |
묘비문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 수화곡 |
公의 諱는 行道이고 字는 士原이며 號는 林谷이니 仁祖 癸亥(1623) 十月十六日에 出生하여 顯宗 辛丑 (1661) 五月十六日에 卒하니 향년 三十九歲이다. 仁祖 丙戌(1646)에 生員試에 入格되고 孝宗 癸巳(1653)에 謁聖文科에 及第한뒤 翰苑에 들어가 檢閱 說書 正言 司憲府持平 春秋館記注官을 歷任하고 外任으로는 龍岡縣令을 지내었다. 뒤에 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에 追贈되었다. 부인은 廣州安氏로서 淑夫人에 追贈되었는데 父는 監司 獻徵이고 祖는 參判 應亨이며 曾祖는 都正 滉이다. 仁祖 癸亥(1623) 十月十四日에 出生하여 孝宗 丁酉(1657) 十二月二十三日에 卒하니 향년 三十五歲이다. 二男一女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萬謙이고 다음은 百謙이다. 딸은 海州人 崔湛에게 시집갔다. 공의 遠祖는 全義사람이니 諱는 棹이다. 高麗太祖를 도와 開國에 큰 功이 있었으므로 그 功績이 高麗史에 빛을 내고 있다.朝鮮朝에 들어와 孝靖公 貞幹이 七十餘歲의 老人으로 百二歲의 어머니를 至極한 孝誠으로 섬기어 世宗께서 특별히 家傳忠孝 世守仁敬의 八字를 써서 褒賞하시니 그 갸륵한 소문이 온나라에 자자하였다. 七代祖 恕長은 精忠出氣敵愾二等功臣으로 全城君에 封해졌으며 諡는 襄簡이다.曾祖는 濟臣으로 字는 夢應 號는 淸江이나 文武全才로서 그 名聲을 온나라에 들날리어 淸江先生으로 불리었다. 祖는 壽俊으로 淸江公의 둘째아들이다. 字는 台徵 號는 志范堂이니 宣祖 庚寅(1590)에 增廣文科에 及第하였으며 孝行이 特出하여 旌閭되었고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에 追贈되었다가 다시 領議政에 累贈되었다. 父는 碩基이고 號는 楊湖이니 孝行이 出天하여 左叅贊에 追贈되고 旌閭되었다. 또한 仲子行迪의 原從功臣一等叅錄으로 左贊成에 追贈되었다. 公은 後嗣가 없는 學基伯父를 承代하였다. 公의 稟性은 溫和하고 善良하여 父母에게는 孝誠이 至極하고 兄弟들과는 友愛가 極盡하며 親舊들과는 모나는 일이 없이 잘 어울리었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여 四書三經과 諸子百家書를 精讀吟味하여 聖賢의 가르침이 몸에 배어서 이것이 言行으로 나타나 正人君子의 道理를 實踐躬行하였다 이밖에 글씨를 잘 쓰고 詩에 能하여 아버지되는 楊湖公의 墓誌를 지으시었다. 그러나 不幸히 早歿하여 그의 平生의 行蹟을 알길이 없었는데 多幸히 東陽尉 申翊聖의 婿郞洪命夏의 挽詞에 그의 行蹟을 잘 표현하였으므로 이것을 바탕으로 간추리어 이 碑文을 지었다. 墓가 처음에는 加平郡 淸平面 三會里 退憂谷에 있었는데 뒤에 志范公의 墓 오른쪽위 艮坐向자리로 移葬하였다. 丙戌(2006)年 七月에 公의 十代孫 鍾濬이 墓誌와 家狀等의 參考文獻을 가지고 와서 墓碑文을 지어줄 것을 懇請하므로 사양할 길이 없어 菲才淺學을 무릅쓰고 敢히 위와 같이 丙戌(2006) 七月 雲孫 江魯삼가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