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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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png 하산공 휘 만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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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표

어허! 이 곳은 나의 외할아버지 하산 이공께서 묻히신 곳이다. 공의 이름은 만겸이고 자는 자익(子益)이시니 전의 이씨이시다. 고려 때 태사 벼슬을 한 도(棹)라는 어른이 시조이시다. 대대로 높은 벼슬한 사람이 이어지더니 조선조에 들어와 중추원사 벼슬을 한 효정공 정간(貞幹)께서 이름을 떨치시고 다음은 경기관찰사를 지낸 사관(士寬)이시고 그 다음은 병조참의 벼슬을 한 예장이시니 3대에 걸쳐 명예와 덕망이 서로 이어졌고 고조께서는 함경북도 절도사를 지내신 어른으로 호는 청강이시고 이름은 제신이시니 재주가 문무를 겸하시어 선조조의 명신이 되시었다. 증조의 이름은 수준(壽俊)이시니 영흥대도호부사이시고 할아버지의 이름은 학기이시며, 아버지의 이름은 행도이시니 사헌부 지평 벼슬을 하시었다. 어머니는 광주 안씨이시니 평안도 관찰사 벼슬을 하신 헌징의 따님이시다. 어른께서는 숭정 경진(1640)에 출생하시었다. 천재의 소질이 남보다 뛰어나시어 문사가 일세에 떨치었는데 특히 변려문1)을 잘 지으시어 한 편이 탈고도 되기 전에 모두 베끼어 가져다가 시작(詩作)의 본을 삼았다. 정유년(1657)에 생원 예문에 급제하시었는데 여러번 시험에 모두 많은 선비의 우두머리의 위치를 점하였다. 그러나 회시(會試)2)에서는 번번히 실패하였다. 계해년(1683) 처음으로 절제(節製)3)에 급제하여 곧바로 전시(殿試)4)에 응시하여 갑과에 뽑히었다. 전례에 따라 종부시 직장(直長)에 제수 되고 갑자년(1684) 정월 초 4일에 졸하였으니 누린 나이가 겨우 45세이었다. 양근의 아무 산 아무 좌향 자리에 장사 지내었으니 여기가 선산이었다.

 

어허! 어른께서는 명문 집안에 태어나시어 일찍 이름을 떨치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문장의 근원지인 예문관 춘추관의 좋은 위치를 점할 것을 기대하였었다. 그때 함께 교유하던 여러 친구들도 모두 당시 이름 높은 선비이었는데 그 높은 재주와 박식함을 논할 때에는 모두 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 명곡 최 석정은 공과 이종 형제간이다. 공의 문재를 아끼어 통곡하면서 이렇게 넉두리를 하였다. 나아갈 때에는 서로 손을 맞잡고 집에서 20여년 동안을 한방에서 거처하였다. 그러니 공을 알리는 사람은 나만큼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자질은 단아하고 성품은 방정하며 기우(氣宇)는 화이(和易)하였다. 그리고 총명하고 슬기로와 겨룰 만한 사람이 없는 데다가 책을 무척 많이 읽어서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해박하고 문장이 뛰어나 그 이름을 당시에 떨치었다. 그 당시에 내노라는 선비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넋을 잃을 뿐만 아니라 옛날의 박학한 높은 재주를 가진 어른도 이만한 재주꾼은 드물었다. 하곡 정 제두 어른은 말씀하시기를 높고 맑은 지조라든지 깔끔하고 굳센 자질과 깊고 넓은 학식과 정교하고 막힘 없는 문장은 이제는 다시 볼수 없게 되었다. 세상에서도 그 재주는 다 아는 터이고 전하여 듣는 사람까지 모두 찬탄하였다. 무릇 두 어른의 말씀이 이같이 즉 다른 사람들이 칭찬한 말은 하나하나 들어서 설명할 수가 없다. 공의 문장이나 행적 명망을 온 세상이 떠받들었음을 알 수 있겠다. 육(錥)으로서는 어른께서 생존하여 계실 때를 보지 못하였고,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여 이 어른의 사실과 행적 등을 보지 못하였다. 또 어디에 가서 들을 데도 없었다. 그런데다가 외가의 알 만한 어른들은 이미 다 돌아가시었으니 공이 살아 계실 때의 여러 행적을 뒷사람으로서 까마득하여 하나도 알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비록 그 사적을 적고자 하나 만분의 하나도 나타낼 길이 없다. 뒷사람에게 전하여 줄 만한 자료가 없다.

 

어허 나의 외할아버지의 재주나 덕행이 모두 파 묻히여 온 세상 사람이 슬프게 생각하고 업적이라든지 행의(行誼)를 적어야 할 것들도 모두 이와 같이 깡그리 없어져 버리었으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나의 아버지께서 장가 드시기 전인 아이 적에 이 어른에게 공부를 하시었는데 언제나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장인께서는 서경을 가르쳐 주시었는데, 마치 친구들과 이야기하듯이 함장(函丈) 밖에 앉히고 입으로 외어가며 가르치시는데 하나도 틀리는 대문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도대체 그 책을 몇해나 읽으시었기에 그렇게 줄줄 외십니까 하니까 대답하시기를 어렸을 때에 대략 한 30번은 읽은 듯한데 그 뒤에는 전혀 읽지를 못하였다고 말씀하였다. 한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기억력이 뛰어나시었는데 내가 어렸을 때에 어찌나 둔하였던지 어머니께서 혀를 차시며 한탄하시기를 우리 아버지의 짝이 없는 총명으로 손자라고는 너 하나뿐인데 저렇게 둔하고 어리석으니 외할아버지의 그 총명하신 자질로서 얼마나 실망하시겠느냐 하시었으나, 나는 그 총명하신 자질로서 얼마나 실망하시겠느냐 하시었으나,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조차 잘 몰랐었다. 또 그 말이 얼마나 뼈에 사무치게 슬픈 말인지도 몰랐었다. 오랜 세월이 지낸 뒤에 여러 글 잘하는 어른들에게 글로 써서 그 업적을 남기어 영구히 전할 수 있는 행장이라도 남기려고 기도 하였으나 집에 전하는 행장도 없고 하여 오늘내일 미루기만 하다가 이제까지 하나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다가 명곡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가장(家狀)이 없이도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었는데 수십년 전에 어찌 이런 일을 생각하지 못하였는지 이것이 모두 이 육(錥)의 죄라 지난 일을 생각하면 후회한들 소영이 있겠는가?

 

어른께서 돌아가신 지 60여년이 지났다. 세월이 멀어질수록 그에 대한 기억이 모두 흐리어져서 현재의 나이 적은 후배들은 이런 어른이 계시었는지조차 모르게 되고 설혹 더러 아는 분이 계시다 하더라도 문자로써 남기어 놓은 몇 가지뿐이라, 그러니 이 어른의 행적을 안다고 하는 사람도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 그러니 누구에게 비명을 써 달라고 청할 데도 없어서 돌아가신 어른께 죄송스럽기 그지없고 매우 통한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던 때에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호서의 안찰사로 계실 때에 비로 쓸 돌을 마련하여 장인께 부치시고 또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의 어머니가 부탁한 것이라 하시었다.

 

어허! 우리 어머니께서 항상 외할아버지께서 훌륭한 행적과 높고 깊은 문장력을 가지시고도 그 좋은 재주가 쓰이지 못하시어 매몰(埋沒)하게 된 것을 항상 한스럽게 생각하시어 묘로 가는 길목에 묘표를 세워서 꼴 베는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또 돌아가신 어른께서 젊었을 때의 부탁을 저버리지 아니하려는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기어이 그 뜻을 이루었으니 이 일이 어찌 자기 개인만의 일이겠는가? 생각건데 이와 같이 글로 써서 남기는 일은 함부로 아무에게나 부탁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이와 같은 사실을 안 바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날짜를 질질 끌어서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차라리 몇 자라도 돌에 새기어 두면 그 묘를 알 수 있을 것이고, 또 나의 부모께서 진실로 경영하신 실상을 기록하는 것이니 어느 사람이든지 이 글을 보면 단박에 어느 어른의 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냥 아무 표지도 없이 방치하는 것보다 훨씬 났지 않겠는가?

 

어허! 슬프기도 하다. 공의 첫째 부인은 전주 이씨이시고 둘째 부인은 문화류씨 이시니 아버지는 학생 진창이시다. 어른께서는 아들이 없어서 군수 벼슬을 한 동생의 아들로서 교관 벼슬을 한 징정(徵鼎)을 아들로 양자하였다. 딸만 삼형제를 두었으니 맏딸은 현감 최 상에게 시집 갔고 둘째딸은 영의정 심 수현5)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학생 김 당에게 시집갔다. 징정은 도사 조 상협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4형제를 두었으니 덕성은 진사이고, 덕장, 덕면, 덕화가 있다. 현감의 아들은 태형이고, 영의정의 아들은 육(錥)이니 딸 형제를 두었는데 맏딸은 부사 정 석기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학생 홍 진보에게 시집갔다. 학생의 계자(繼子)는 석구이다.

 

어허! 슬프다. 누구인들 어머니의 친정이 없을까마는 그러나 육(錥)과 같은 특별한 사정이 있는 외가는 없을 것이다. 내가 비록 어리고 우둔하여 아는 것이 없다 하겠으나 오히려 우리 어머니께서 친정어머니의 수난을 뼈아프게 느끼시어 밤이나 낮이나 부심하시어 세상살이를 모두 잊으신 듯하였다. 매양 이 일을 생각하면 두렵고 그리워서 가슴이 두근거리었다. 내가 이제 정성을 쏟아야 할 일은 오직 묘로 가는 길에 표석을 세우는 일로써 이 일만이 부탁을 저버리지 않는 길이다. 이 일만은 내가 꼭 지키려고 한다. 옛일을 생각하여 지금도 눈물이 샘솟듯 한다. 몇 해 전 지산(止山)에 있을 때에 집의(執義) 박 추와 종숙이 와서 보시고 술잔치에 참여하였다가 돌아가시었는데 그때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외할아버지 이공께서는 장자이시었다. 암 장자이시고 말고 내가 젊었을 때에는 그 어른을 깊이 알지 못하였는데 가만히 떠도는 여론을 들어 보면 청계(淸溪)의 홍군과 정말로 백중이 될 것이다. 하시었다. 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기를 장자이시지 암 장자고 말고 하시었다. 박공께서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그 분이야 마음에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록 온 세상이 높이 받들어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는데 나의 외할아버지에 대하여 이렇게 칭찬하는 것을 보니 보고 듣는 가운데에서 이 어른을 깊이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손 성균관 좨주 저촌 심육(沈錥) 지음

 

<註>

 

 

1) 변려문(騈儷文) : 사륙문(四六文)이라고도 하는데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성행하였다. 넉 자와 여섯 자씩의 댓귀(對句)를 써서 지은 화려한 문장 변려문의 특징은 ①댓귀를 많이 사용한다. ②4자 다음에 6자의 귀조(句調)를 기본틀로 한다. ③음조(音調)의 율동이 자연스러운 것 ④전고(典故)를 많이 사용한다. ⑤문사가 곱고 화려하여햐 한다.

2) 회시(會試) : 초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다시 보이는 과거

3) 절제(節製) : 절일제(節日製)의 준말인데, 조선조 시대 매년 정월 7일, 3월 3일(上巳), 7월 7일(칠석), 9월 9일 중양(重陽)에 성균관에서 유생과 지방의 유생에게 보이던 과거. 급제하면 문과의 전시(殿試)나 복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거나 또는 시상하기도 하였다.

4) 전시(殿試) : 임금이 직접 참가하여 보이는 과거의 마지막 시험, 문과와 무과의 복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제술과 무예로써 시험하여 그 성적에 따라 갑과(甲科) 을과(乙科) 병과(丙科)의 등급을 정하여 급제를 시킨다.

5) 심수현(沈壽賢) : 조선조의 문신 자는 기숙(耆叔) 호는 지산(止山) 본관은 청송(靑松) 숙종 30년(1704)에 춘당대 문과에 병과로 급제 1707년 수찬이 되고 영조 3년(1727)에 우의정에 오르고 영조 8년(1732)에 영의정에 올랐다. 1734년 청나라에 가는 사은사에게 관상감원을 수행시켜 달력 만드는 신법을 연구해 오게 했다.

 

 

 

 

 

霞山公 諱 萬謙 墓表

嗚呼 此吾外王考霞山李公衣履之蔵也 公諱萬謙 字子益 系出全義 以高麗太師棹 爲始祖 仍世大官 入我朝 中樞院使孝靖公貞幹 京畿觀察使士寬 兵曹叅議禮長三世 名德相承 高祖咸鏡北道節度使號淸江諱濟臣 才兼文武 爲宣祖朝名臣 曾祖諱壽俊 永興大都護府使 大父諱學基 考諱行道 司憲府持平 妣廣州安氏 平安道觀察使獻徵之女也 公生於崇禎庚辰 天才絶葬 文辭高一世 尤工於騈儷 每一篇未脫藁 諸公輙取去 傳寫以爲法 丁酉 中生員禮闈 屡冠多士 碩不利於會試 癸亥 始以節製 直赴殿試 擢甲科 例授宗簿寺直長 以甲子正月初四日卒 享年蓳四十五 葬于楊根某山某向之原 徙先兆也  嗚呼 公生自名閥 華聞夙彰 人或以詞垣館閣期之 幷遊諸公 亦一時之彦 而論其高才博識 多自以爲不可及 明谷崔公錫鼎 與公爲姨兄弟 哭公之文 有曰 出則聯裾 居則共寢者二十年于玆 知兄者莫我若也 姿性端方 氣宇和易 聰悟絶倫 淹貫羣書 靡不包羅總括 詞藻夙就 聲名籍甚 不惟一時流輩瞠乎下風 雖古之博雅 亦鮮其儷 霞谷鄭公齊斗則曰 高雅之志 愷悌之資 淹博之學 精敏之詞 今其不可得以見之 世所共識 傳聞亦嗟 夫二公之言如是 則餘人贊道之 雖不必盡擧 而公之文行望實 爲一世所重 槩可知已 錥生不及公在世之日 幼而失母 於公之事行 旣無所覩記 又未有所傳聞 而外氏尊屬 凋逝已盡 公之流風餘韻 在於後人者 邈然不可復見雖欲追述其萬一 傳示於久遠 將何所徵乎 嗚呼 以吾外翁之才之德 而身旣沉屈 爲世所悲 志業行誼之可述者 又已掩翳不彰 乃至於此 寧不於邑 吾先乎自童子時 就公學 嘗謂不肖曰 外舅以尙書授我 而方與人酬酢 使之坐於函丈外 誦而傳之 不曾有錯 人問其讀是書幾許牟而乃爾 答曰 少日讀至三十遍 而其後不能讀云 先妣有記性絶異 而不肖自釋少時鈍根甚 先妣嘗自咄曰 以吾父之聰明 而乃有孫如汝者耶 不肖方愚昧 不能仰扣外王父聰明之如 何而亦未知其言之爲可悲也 久欲以文字 請於立言君子 要爲不杇之圖 而以家狀未就 因循迄今 使其及於明谷在世之日 則不待家狀 亦必可成 而竊恨不能商量於數十年之前 此莫非錥之罪也 公之下世六十餘年餘矣 日月寢遠 聲光寢微 今之後生少輩 幾不知有公 設或有知之者 不過得之於功令文字之間 則其所以知公者 乃所以愈不知公也 遂不敢徒人乞銘 以賁幽堂 而心竊有所痛恨 亦省所大懼者 先人按湖西時 治一小石 載送於舅氏 而且語不肖曰 此汝母所托也 嗚呼 吾母嘗恨外王父以卓行高文 埋沒不顯 爲至恨 必欲爲標墓道 俾不至於百世芻牧之原 而先人又不忘少日之托 畢竟獲遂其志 則此事何可但已 第以文字之不可托於人者 旣如此 若或荏苒不能擧 則無寧以數語識其石 且記吾父母所以經營之實 使人知爲某公之墓而已 則不猶愈於闕然遂廢者耶 嗚呼悲夫 公前配完山李氏 考某 後配文化柳氏 考學生震昌 公無子 取弟郡守之子 敎官徵鼎而子之 女三人 長適縣監崔祥 次適領議政沈壽賢 次適學生金堂 徵鼎娶都事趙尙協女 有四子 德星進士德章德冕德헬縣監子 泰亨 領議政子 錥 女二 長適府使鄭錫耆 次適學生洪鎭輔 學生繼子 錫履 嗚呼 人孰無母家 而寧復有如錥之情事者耶 雖在穉昧無所識 而猶記吾母痛念慈氏遘難 日夜腐心 忽若無生 每思之 怵然心驚 不肖之所可致力者 只有墓道之表 不負所托也 而乃不免單單如是 俯仰懷痛 有淚澘焉 頃年在止山時 朴執義樞從叔臨見 中酒以徃 放言不碩 且曰 君之外翁李公 長者者者 吾時年少 不能深識公 而竊聽於輿論 則以淸溪洪君 實相伯仲云 又亟稱之曰 長者者者 朴公於醉後 心所不可者 雖擧世尊之而碩 不恤 至於吾外翁 乃若是者 必於見聞之世 所以知公之深故爾 外孫 成均館 祭酒 樗村 沈錥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