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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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png 성균생원공 휘 명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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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과 서문

흥인문을 나서서 동북쪽으로 30리를 가면 토원兎院 대천大川을 건너게 되고, 여기서 또 꺾이어 동쪽으로 몇 리쯤 가면 서쪽으로 활짝 트인 골짜기가 있으니, 이름이 나입곡奈入谷이다.

 

산 봉우리와 기슭이 감싸고 돌며 수풀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는데 숙종대왕 때의 이조吏曹 참판判을 지낸 이공 정겸廷謙의 묘가 그 가운데 있다. 공의 묘에서 동북쪽을 바라보고 또 수 백보가면 간방을 등지고 곤방을 향하여 넉자 높이의 봉분이 있으니, 이것이 나의 사위 이군李君 명배名培 효여孝如와 그 아내 임씨의 묘이다. 군의 아름다운 인품은 하늘이 주신 바로서 티를 닦아낸 온옥溫玉인 듯하여 보는 사람은 그에게서 한 점의 티끌과 속기를 찾을 수가 없다. 어려서 부터 총명하여 나이 겨우 13살에 삼경과 사자四子를 다 통通하였고 약관도 되기 전에 문사와 식해識解가 높이 빼어나서 놀랍고 볼만한 바가 있었으며, 일찍이 다른 사람과 배운 글 수편에 대하여 토론하였는데 노사 숙유宿儒도 이에서 더 나을 수 없었다. 28세에 생원시에 뽑히었고, 공부에 힘써 매일 열심히 글을 읽었다. 집이 아주 가난하여 거친 옷과 나물밥으로 연명하는데도 그나마 이어 나가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생산을 경영하는 일은 하지 아니하고 책읽는 일은 밥보다도 더 좋아하여 세상물정에 대하여는 가축家畜처럼 전혀 모르고 지내면서도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군을 바보로 생각하고, 군도 또한 바보로 자처하면서도 이것을 조금도 혐의롭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태연하였다. 나의 딸이 18세에 군의 아내가 되었는데 성질이 온순하고 비약하지만 시부모를 극진한 효성으로 섬기고 군을 받드는 데에 털 끝 만큼도 행실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시집 식구들이 모두 칭찬하여 말하기를 만약에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정말로 학문을 할 소질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군을 도와 내치에 힘쓴 지 수십년에 천 백가지의 참을 수 없는 어려운 고비를 겪으면서도 친정부모를 대하여서는 얼굴빛 하나도 찡그리는 일이 없어서 부모조차도 그 딸이 얼마나 가난이 심한지를 몰랐다.

 

군이 금상 정조 신축년(1781)에 병이 들어 9월 17일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겨우 36세이었고 내 딸은 군보다 세살이 위이었는데 군이 세상을 떠난 지 2년후인 계묘년(1783) 1월 28일에 마침내 군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슬픈지고!

하느님도 무심하구나. 이 곱고 깨끗한 사람들끼리 부부로 결합시켜 놓고 하루도 안락하게 살아보지 못하게 하고 죽은 뒤에 한점의 혈육血肉도 남기지 못하게 하시니 망망한 천지간에 호소할 곳이 어데인가?

슬프고 원통하다.

이씨로서 전의로 관향을 삼은 집은 고려태조 때의 태사공 도棹를 시조로 삼는다. 우리 세종 때의 효정공孝靖公 휘 정간貞幹과 선조 때의 함경북도 병마사 휘 제신濟臣은 세상에서 이르기를 문•무의 재주를 온전히 갖춘 분들이라 하였고, 3대를 내려와서 정선 군수 휘諱 행운行運이 휘諱 언겸彦謙을 낳았고, 언겸이 징후徵厚를 낳았으며, 징후가 연기 현감 덕중을 낳았는 데 몇 대동안은 그다지 크게 현달하지는 못하였고, 참판공 정겸廷謙은 군에게 종증조가 된다.

 

현감공은 풍류가 유아儒雅하여 당시의 사우들의 전허進許하는 바 되었었는데 상주박씨尙州朴氏에게 장가들어 군을 낳으니, 군이 어려서 의지할 곳을 잃은 뒤에 그 재종숙부再從叔父 감역 덕윤德胤의 집으로 돌아가 의지하였으니, 감역공은 인륜에 돈독한 군자로서 젊어서 현감공을 섬기기를 친형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군君을 거느리고 양육養育하는 데에도 친親아들처럼 여기면서 가르치고 타이르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군의 내외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있는 힘을 다하여 모든 일을 주선하고, 참판공의 영역塋域곁에 장사지내 주었다.

아! 현감공이 어진 덕업德業을 쌓고 깨끗한 행적行績을 남겨 세상에 끼친 바 공이 적지 않은데, 돌아가신 뒤에 4대째에서 대가 끊기어 후손이 없게 되었으니 천도天道가 잘못된 것인가? 정말로 알 수 없는 일이로다.

 

나는 풍천임씨角川任氏이니 선고의 휘는 광珖이며 홍문관 응교를 지냈다. 8세 동안 영화로운 벼슬로 이어 온 선비집안인데 희성希聖에게 미치어서는 자취는 천하고 운명은 궁하여 여러 아들을 앞세우고 통곡했는데 이제 또 군의 내외를 통곡으로 보냈으니 내가 스스로 생각건대 나의 평소의 잘못한 죄에 대한 벌을 나에게 내리지 않고 도리어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 딸과 사위에게 옮겨내린 것이니 슬프고 원통함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에 피눈물로 먹을 갈아 명을 엮노라.

빼어난 지아비가 일찍 죽더니,

지어미는 정절지켜 뒤따라 갔네.

저승문 한번 닫혀 말이 없으니

무궁한 앞날에 한恨만 맺혔네.

피눈물 뿌리면서 사실 적노라.

악부岳父라고 불리던 병든 노부 서하 임희성任希聖 자시子時가 지음

 

※임희성任希聖 : 자는 자시子時, 호는 제윤在澗, 풍천인, 판사 상원相元의 증손, 응교應敎 광珖의 아들, 직장直長 벼슬을버리고 은거하면서 학문을 즐겼는데 그 뜻이 매우 강하였다. 문집 6권이 있음.

 

 

 

 

 

成均 生員公 諱 名培 墓誌銘 幷序

 

出興仁門○東北行三十里○涉兎院大川○又折而東○幾里許○有谷甲然西開○其名曰奈入谷○岡麓回轉○ 林樹追斟○肅考世○吏曹判李公廷謙之墓在其中○自公墓東北○望又數百步○有背艮面坤而成四尺之封者○是爲吾壻李君名培孝如○其妻任氏降魄之藏○君微質天賦如溫玉拭瑕○見者知其無一點塵俗氣○自幼聰明特異○年十三○盡通三經四子○未弱冠文辭識解卓然有可觀○嘗與人論學書數篇○老師宿儒○弗以過之也○二十八選補生員試○力學泛濫○日孜孜不己○家極貧粗衣菲食○每患空乏絶○不爲經營生産事○獨嗜書若寢螺於人情物態○反多煖略○人皆目君以迂癡○君亦以迂癡自居○不少爲嫌○處之裕如也○吾女年十八○爲君婦○性溫順卑弱○事舅姑極其○孝 奉君無毫髮違行○舅黨或稱之曰○使其爲男子○眞學問資也○佐君內治數十年○經千百艱難○對父母未嘗作皺眉色○故父母有不盡知其女之貧甚也○君以今上辛丑寢疾○歿于九月十七日○得年葯三十六○吾女生先君三歲○君詮之越二年○癸卯正○月二十有八日○竟隨君以死○嗟呼天旣以兩美坪合○反不岡之一日安樂○死以無一塊肉見遺○茫茫天地○靡所寫訴痛矣寃矣○李氏之貫全義者○以高麗太師棹爲鼻祖○我世宗時○有孝靖公貞幹○宣祖時有咸鏡北道兵馬使濟臣○世稱其文武全才○三傳而旌善郡守諱行運○生諱彦謙○彦謙生徵厚○徵厚生燕岐縣監諱德中○仍世不大顯○判公於君爲從曾祖○縣監公風流儒雅爲一代士友所推許○娶尙州朴氏○生君○君自失鞠恃○歸依其再從叔父○監役德胤監役君篤倫君子人○少嘗事縣監公○不間同胞○率育君如親生○終始敎誨之無倦○芳君夫婦之次第剝函○盡心經紀○彭從葬于判公塋域之側○嗚呼縣監公○積仁潔行○弗少施於世○身歿而四世血胤又轍絶無餘○天道乖魚○誠有不可知者矣○吾任川人○先君子諱珖○弘文館應敎○八世榮宦至及希聖○跡賤命窮○累哭子男○今又哭君夫婦○自念平 愆殃○天不降罰于我○反移禍於其所鍾愛痛矣寃矣○更何言哉ㅍ玆乃漬血和墨而爲之○銘曰夫秀而妖其年○婦貞而繼其後○幽室之一閉○終竟齋恨於來代之永久銜哀○而敍紀實之事○寔惟君呼爲氷岳○澗畔之病璟○西河任希聖子時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