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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와공 휘 명준 신도비 |
신도비명과 서문
휘는 명준(命俊)이요 자는 창기(昌期)이니, 함경북도(咸鏡北道)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된 청강 이공 휘 제신(濟臣)의 넷째 아들이다. 청강공이 문무를 겸한 큰 재주가 있으면서도 그 포부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지만 지금 사대부 중에서 전왕시대의 인재를 손꼽아 볼 때에 큰 일을 맡길만한 인재로는 청강이 반드시 그 사이에 끼게 된다. 청강공께서 세상을 떠날 때에 공의 나이가 열두살이었지만, 초상을 예로써 치렀으며 월천 이정암(李廷襤)과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에게서 학문을 닦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우계(牛溪) 성선생(成先生) 혼(渾)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이 스승을 닮았고, 품성이 곧세고 정직하며, 뜻이 금석과 같이 굳었었다. 사실의 시비를 가릴 때에는 이치의 옳고 그름을 마음 속에 한번 정하면, 천만의 사람이라도 꺾을 수가 없었다. 정당한 짓을 하거나 부당한 짓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귀하고 세도가 있건 외롭고 천하건 간에 그런것에 아랑곳없이 옳고 그름을 준엄하게 가리었다. 나아가고 물러날 자리, 사양할 것과 받을 것에 대하여 마음에 털끝만큼이라도 불안한 점이 있으면 구차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그 행동이 지나침은 있을지언정 부족한 점은 없었다. 29세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3년 뒤인 계묘년(1603) 정시 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예조 병조 호조 등 4조의 좌랑, 지제교, 춘주관 기주관, 고산 찰방, 덕산 서원 두고을의 현감, 평양부 서윤, 사헌부 장령, 군기시 정, 홍문관 수찬과 교리 및 응교, 충청도 관찰사, 형조 참판, 호조 참판, 전주 부윤, 강릉 대도호부사,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나이가 59세에 세상을 떠나니, 국록을 먹은지 30년이 되었으나 제대로 입을 만한 갖춘 옷 한벌이 없었고, 처자는 항상 주린 빛을 면하지 못하였다. 공이 강릉에서 돌아온 것이 금상이 즉위한 지 8년만이었다. 상소를 올려 시정의 잘못된 점을 극론하고, 하나 하나 지적하여 임금의 잘못을 들어 시정할 것을 논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다른 사람으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낼 말들이었다. 또 말하기를 『신이 듣자오니 한 두 사람의 조신이 옳지 않은 방법으로써 사사롭게 여자를 바쳤다고 하는데 옳지 않은 길이 한번 열린다는 것은 나라가 망할 징조이니, 청컨대 내어 쫓으소서』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께서 즉시 그 여자를 내어 보냈고, 특명으로 공을 대사간으로 제수 하였다. 이것을 본 대신들이 공의 소청으로 인하여 알려진 여자를 중매한 사람을 죄로 다스릴 것을 청한즉 임금이 노하여 말씀이 대단히 엄하니 조신들이 모두 두려워하였지만, 공은 대사간 취임을 받지 않고 다시 상소를 올렸는데 말이 더욱 절실하니, 임금께서 감동하여 잘못된 것을 깨닫고 손수 글을 써 내리어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공이 그제야 출사하였다가 바로 뒤에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다시 병조 참판으로 임명되였으나 사임하고 양천의 원당골로 돌아가서 초가집 두어칸을 짓고 살았는데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다. 공이 일찍이 그 호를 잠와라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그 집을 퇴사재(退思齋)라고 하였으니 임금을 잊지 않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병이더치자 유명으로 장사를 검소하게 지낼 것을 당부하고 가까운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아들들을 부탁하고, 부녀자를 물리친뒤 평안한 자세로 세상을 떠나니 경오년(1630) 12월 22일이었다. 부고가 전하여지자 임금께서 하교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아무는 나라일에 온 정성을 바치었고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데 뜻을 두었더니 불행히 세상을 떠나니 내가 심히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 초상비용이나 장사의 용역을 모두 국가에서 지급하여 그 충성을 밝혀주라 』고 하였다. 다음해 신미년(1631) 2월 16일에 양근의 청강공 산소 왼쪽 간좌의 언덕에 장사지내었는데, 이때의 자세한 경위가 청강공의 묘비에 갖추어 실리어 있다. 공이 벼슬살이 할 때에 자기 몸가짐을 반성하면서 아랫사람을 단속하고, 법을 지키고 직무에 충실하니, 간사한 무리들이 기를 펴지 못하였고, 비록 엄한 상관이라도 자신의 사성을 채우기 위하여 공의 말을 조리돌림 할 때에는 내어 쫓지않은 예가 없었다. 서원 현감으로 있을 때 하루는 물새들이 성중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고 공이 영을 내리어 허술한 옛 방축을 수리하고 둑을 쌓게 하였더니 바로 뒤에 큰 장마가 져서 경작지와 집이 모두 물속에 잠기었으나 성은 무너지지 않아서 백성들의 피해가 없었으니 미리 방비한 때문이었는데, 온 경내가 신명이 통하는 어른이라고 칭송하였다. 평양은 가옥들이 서로 총총히 붙어있고 이엉에는 불이 붙기 쉬워서 해마다 화재가 심하였다. 공이 이 고을 서윤으로 부임하여 기와장(匠)이나 옹기장이를 위하여 그 세금을 감하여 값이 싸도록 하여 주니 백성들이 즐겨 이 기와를 사들여 쓰니 일년 뒤에는 기와집이 반이 넘었다. 기와 이은 집에서 무명으로 세금을 받아서 백성이 낼 세금으로 대충시키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모두 구제되었다. 계축년(1613) 옥사(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한다고 무고하여 일어난 옥사)에 간사한 무리가 공을 시기하여 법을 어기어 가면서까지 영덕으로 귀양보내니, 곤란하고 가난하기는 더욱 심하였으나 그 지조와 언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이때 유언비어가 길목마다 나돌아서 서궁(인목대비)이 시해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공이 소복으로 외지에 있었는데 백사 이공 항복(恒福)이 폐모를 간하다가 죄를 얻었다는 말을 듣고, 공이 상소를 올리니 극렬한 어조로 일관되어 있으므로 현리가 감히 받치지 못하였다. 공이 답답하고 슬픈 나머지 물에 빠져 죽으려 하였는데, 집사람이 그 기미를 미리 알고 구하여 이에 무사하였다. 계해년(1623)에 반정이 된 후 장령으로 불려들어 갔다가 바로 군기시 정正으로 승진되었고, 옥당에 선발되어 들어갔다가 명을 받고 영남에 내려가서 민정을 살피었는데 미처 돌아오기 전에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 뒤 한달만에 이괄이 반하여 임금께서 공주로 피난하시니 공이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여 큰일에 결핍함이 없게 하였더니 위로의 뜻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급시켰다. 정묘년(1627)에 서로(西虜)가 쳐들어와서 임금께서는 강화로 피난하시고, 세자가 위임을 맡아 남하하자 공이 모시고 전주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유언비어가 나돌기를 적군이 깊이 쳐들어왔으므로 바다의(섬)으로 이피하려 한다고 하니, 공이 강도에서 한발작도 더 멀리 떠나서는 아니 된다고 역설하고 또 동궁[世子]께 들어가 뵙고 힘을 다하여 군사를 조발하여 구원하러 갈 계책을 역설하였다. 뒤에 임금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매우 아름답게 생각하여 특별히 호피와 구마를 하사하여 포장하였다. 강릉 풍속에 재역(계를 말하는 듯)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가난한 백성들이 이 부담을 견디지 못하였다.
공이 토호들을 불러 이 제도를 엄금하기로 약속을 하고 어기는 자는 법에 의하여 다스렸더니 한달이 못되어 이 풍속이 고치어지니 노인들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우리고을에 옛날부터 행정 잘하는 원님이 많이 있다가 갔지만 이 어른 같은 이는 전에는 들어본 일이 없다.』고 하였다. 공이 서원 현감으로 있을 때에 친구인 송상인(宋象仁)이 그 어버이의 표문 내용이 무고를 당하여 잡혔고 장차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공이 이를 위하여 상소를 올리어 그 억울한 것을 아뢰었더니 방백이 진달하기가 두려워서 덮어둔 일이 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관찰사가 파면되어 집으로 돌아갔고, 송씨는 사건 뒤에 이어서 관찰사로 부임하였는데 이분은 임진란에 순절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의 동생이었다. 그 송씨가 벼슬자리에 있을 때의 언행이 공과 비슷하였지만 송씨는 위엄을 주로 하였고 총명한 슬기로 대쪽같이 결단하거나, 선비의 풍도에 어긋나지 않게 처리하는 역량은 공만 못하였다. 공의 가문(家門)은 대대로 절의에 살고 의리에 죽는 것을 가훈(家訓)으로 서로 이어나갈 것을 기약하다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세상을 떠난 뒤로는 집안에 남은 재산이라고는 없었으며, 염할 때부터 장례치르는 일까지 남의 도움을 얻어야 하였고, 또 이 일에 협력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아! 애석한지고, 슬픈지고. 부인은 의성김씨이니 첨지 찬조의 딸인데 아들 삼형제 딸 형제를 두니, 아들은 현기(顯基) 도기(道基) 원기(原基)이고, 맏딸은 홍구주(洪九疇)에게 시집갔는데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둘째는 심광사(沈光泗)에게 시집갔다. 도기와 홍씨 심씨에게 자녀가 있으나 모두 어리다. 이어 명을 다음과 같이 엮는다.
우뚝 할손 청강이어 문무가 겸전인데,
시기와 방해만나 지닌 포부 다 못 펴니,
후사에서 받은 갚음 공이 많이 차지했네.
하늘에서 타신 성정 자르고도 모 나셔라
눈보다 결백하고 금석보다 더 강했네
지방 치적 전례 없고 떠나신 뒤 빛 더 났네
왕의 잘못 충간하여 두 간신이 제거되니 바르고도 모 나셔라
하늘도 공 말이면 번개치듯 시행했네
슬프다 공의 정의 옛 사람인들 뉘 벗하리.
여기 묘비 높이 서니 앞에는 물 뒤에는 고봉,
행적을 명에 담아 후세까지 알리려네.
우인 안동 김상헌金尙憲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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潛窩公 諱 命俊 神道碑銘 幷序
公諱命俊○字昌期○咸鏡北道兵馬節度使○贈議政府領議政○淸江李公諱濟臣之第四子也○淸江公○有文武大才○不究厥施○至今士大夫○追數先朝人○材可任大事者○淸江必在其間○淸江之沒○公年十二○行喪盡禮○受業月川李公廷襤○白沙李公恒福○長遊牛溪成先生門下○學有師法○稟性剛正○志堅金石○論事是非○理當否一定於內○千萬人不能移也○見有爲正爲不正者○不以其人○貴勢孤賤○而白黑之甚辨也○於進退辭受之間○心一毫不安○不一苟處也○盖其行有過而無不及者焉○年二十九擧進士○後三年癸卯○庭試壯元○歷成均館典籍○司憲府監察○禮兵刑戶四曹佐郞○知製敎○春秋館記注官○高山道察訪○德山西原二縣監○平壤府庶尹○司憲府掌令○軍器寺正○弘文館修撰校理應敎○忠淸道觀察使○刑曹判○戶曹判○全州府尹○江陵大都護府使○司諫院○大司諫○兵曹判○年五十九卒○歷位祿食三十年○而衣服不完○妻子恒有飢色公之自江陵歸○實今上卽位之八年也○上疏極論時政闕失○指斥上躬○皆言人所不敢言○又曰臣聞一二朝臣○寅緣曲徑○私進女子○曲徑一啓○亡國之兆○請出之○疏入上卽出其女○特除公大司諫○己而大臣因公疏○請治媒進之人○上怒辭旨己嚴○朝臣皆懼○公不拜命○復上疏○言益切○上意感悟○手札慰勉○公乃出尋以病辭○拜兵曹判○又辭歸臥陽川之病谷○草屋數間○不蔽風雨○公嘗號潛窩○至是名其齋曰退思齊○不忘君也○病遺命儉葬○貽書親友○託其諸子○屛婦女車然而逝○是年十二月二十二日也○訃聞上下敎曰○李某盡心國事○有意格君○不幸鉞逝○予甚惜之○其喪費凡役○官給之○用表其忠○明年辛未二月十六日○葬于楊根某山○淸江墓左負艮之原○世次具載淸江墓碑○公所居官○檢身束下○守法張職○奸猾氣死○雖嚴上官○無不黜己私徇公之言○西原○一日水鳥集城中○公下令修舊防設儲杷○未幾大水○田廬盡沒○而城不懷○民不病○以先有備也○一境稱神明○平壤屋比而獄火○歲爲若○公至官○爲陶瓦而賤其畸○民樂爲市○一歲瓦屋過半○收其布○以代民租○公私俱濟○癸丑之獄○奸黨忌公枇法○竄盈德○困淚益深○而視其操履無小變○道路流言○西宮遇弑○公 服居外○及白沙李公諫廢母得罪○公上章極言○縣吏不敢受○公悲傷鬱黍○有懷沙之意○家人覺之○救乃止癸○亥反正○以掌令召○俄陞軍器寺正○選入玉堂○受命○往嶺南察○民隱未還擢界湖節○後一月李适叛○上如公州○公夙宵缸竭○無乏大事○備見慰勞○進嘉善大夫○丁卯西虜大入○上幸江都○世子受委南下○公陪至全州○訛言寇深議欲移避海上○公倡言不可遠江○都一步○入見東宮○又力陳調兵赴援之策○後上聞甚善之○特賜虎皮廐馬以奬之○江陵俗設財役貧小民不堪○公召土豪○立禁約違者正法○朞月遂大革○父老相謂吾州古多惠政○如公前所未聞○公在西原友人宋象仁○其親表遭誣告○連逮將死○公爲疏訟其寃○方伯懼寢不聞○而坐此竟罷歸○宋後亦至○觀察使卽壬辰死事○宋東萊象賢之弟也○其居官制行○與公略相同○而宋主威嚴○至於聰明剖斷文○至以儒雅頗遜○於公世以伏節死義○期之相繼而歿○歿後家無餘資○自含殮以往○皆待人以擧○又無不同焉○嗚呼其可惜也○其可哀也○夫人義城金氏○僉知纘祖之女○三男二女○顯基道基元基○女適洪九疇○先公歿○次適沈廣泗○道基元基洪沈○各有出俱幼○銘曰萄萄淸江○文武兩有○閼不盡蓄○以發其後○惟公嗣之○性情直方○匪雪雪白○匪金金剛○郡績前最憧政後肅○緘章格王○二妖去側○至言動天○雷電爲收○嗟公秉正○在古誰邸○有石屹立○前渟後矗○載廻○載銘○來世之燭○友人安東金尙憲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