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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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png 합천공 휘 선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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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과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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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선군 홍북면 중계리 동막

약천 남구만 지음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비조(鼻祖)가 태사(太師) 휘 도(棹)이니, 신라 말엽과 고려 초기에 큰 공로가 있어서 명망과 덕행이 서로 이어졌으며, 본조에 들어와 공로와 문벌이 크게 빛났다. 근대에 휘 제신(濟臣)이 있었으니, 세상에서는 청강 선생(淸江先生)이라 칭하는바, 문장과 절행(節行)이 한 세상에 높았으며, 벼슬이 북도 병마절도사(北道兵馬節度使)였고 여러 번 추증하여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 막내 아드님인 휘 명준(命俊)은 호가 잠와(潛窩)인데, 깨끗한 지조와 곧은 절개로 인조 때에 이름이 드러나고 청백리에 뽑혔는바, 벼슬이 병조 참판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배위 의성 김씨(義城金氏)는 첨지중추부사 찬조(纘祖)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경술년(1610, 광해군 2)에 공을 낳았다.

공은 처음 이름이 원기(元基)이고 자가 선장(善長)이었는데, 휘를 선기(善基)로 고쳤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어서 온화하고 순수하고 깨끗하니, 잠와공(潛窩公)이 매우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金先生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도록 명하였는데, 공이 뜻을 가다듬고 학업을 연마하여 날로 성취하니, 신독재 선생이 자주 칭찬하였다.

내외의 상을 당하여는 집상(執喪)을 잘한다고 알려졌다. 만년에 가문의 음덕으로 경양 찰방(景陽察訪)에 제수되었다가 종부시 직장으로 옮기고 주부로 승진하였으며, 의금부 도사와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다. 흡곡 현령(歙谷縣令)으로 나갔다가 체직되어 돌아와서 사복시 주부가 되었다. 이때 우재(尤齋) 송 상공(宋相公)이 이조의 장관이 되어 공과 동문(同門)의 의리가 있으므로 공의 어짊을 익히 알고 품계를 크게 올려 면천 군수(沔川郡守)로 제수하였는데, 마침 과오로 의금부에 나아가 심문을 받았으나 대질하여 억울함이 풀렸다.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나갔는데 도백(道伯)과 어사(御史)가 연달아 표창하여 특별히 우대해서 두 번이나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병사(兵使)의 뜻을 거슬러 덕산(德山)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석방되었다.

향년이 겨우 환갑이 되던 해에 한양의 우거하는 집에서 별세하였다. 처음에는 양근(楊根)에 있는 선영의 왼쪽에 장례하였다가 25년이 지난 계유년(1693)에 풍수가의 말을 따라 홍주(洪州)의 신촌리(新村里) 자좌(子坐)의 산에 개장(改葬)하였다.

공은 평소 집안에서의 행실이 순수하게 구비되고 몸을 다스리기를 청고(淸苦)하게 하였으니, 이는 비단 천성이 그러하였을 뿐만이 아니다. 가정에서 교육받고 스승과 벗에게 훈도됨이 또한 어찌 적겠는가. 백씨(伯氏)가 일찍 별세하고 형수 이씨(李氏)가 집안 살림을 주관하였는데, 공은 형수를 섬김에 매우 삼가서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모두 여쭈어 행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친구들에게서 받은 선물과 관청의 녹봉이라 할지라도 일찍이 처자식들에게 사사로이 주지 않고 반드시 모두 이씨에게 보내서 그 뜻에 따라 처리하게 하였으니, 이는 더욱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닌바, 나머지는 미루어 알 수 있다. 공은 항상 말하기를 “사대부는 돈과 재물 보기를 마땅히 토개(土芥)와 같이 해야 한다.”하였다. 이 때문에 내외의 관직을 20여 년 동안 지냈으나 털끝만큼도 자손을 위하여 도모한 것이 없었다.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광평대군(廣平大君) 장의공(章懿公) 여(璵)의 후손이요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 일(佾)의 따님이다. 공을 섬김에 부도(婦道)를 지켜서 예를 어김이 없었으며, 공이 별세하자 서출들을 어루만지기를 자기 자식처럼 하였다. 두 아들이 고을 수령이 되어 번갈아 전성(專城)의 봉양을 누렸는데, 항상 경계하기를 “백성을 대할 적에 조심하여 원망이 이 늙은 어미에게 미치지 않게 하라.” 하였다.

장남 행정(行政)은 삼가 현감(三嘉縣監)이고 차남 행경(行敬)은 문경 현감(聞慶縣監)인데 백부(伯父) 현기(顯基)의 양자가 되었으며, 다음 행교(行敎)는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족부(族父) 석근(碩根)의 양자가 되었고, 다음 행징(行徵)은 통덕랑이다. 딸은 군수 김수빈(金壽賓)에게 출가하였다.

행정은 1남을 두었으니 만희(萬熙)이고, 행경은 2남을 두었으니 만혁(萬赫)과 만각(萬珏)이고, 행교는 2남을 두었는바 만시(萬始)는 현재 아산 현감(牙山縣監)으로 있고 다음은 만배(萬培)이며, 행징은 만배를 양자로 삼았다. 김수빈은 1남 성익(盛益)을 두었다. 내외의 손녀와 증손과 현손은 너무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측실에게 5남을 두었으니, 행돈(行敦), 행철(行撤), 행치(行致), 행필(行弼), 행애(行敱)이다.

옛날 우리 선친은 공과 거주하는 곳이 서로 가까워 형제간의 의리를 의탁하였으며, 나는 총각 시절에 또한 여러 번 직접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받았다. 공이 별세하자, 공의 장자인 삼가군(三嘉君)이 선대의 의리를 생각하여 나에게 묘갈문을 청하니, 나는 예로 한 번 사양하였다가 공경히 응낙하였다. 그러나 글을 미처 짓기 전에 삼가군이 갑자기 별세하여 천고의 사람이 되었다. 이제 그 아들 만희가 또다시 선대의 뜻에 다라 와서 글을 요청하니, 아! 내 실로 불민(不敏)하나 거듭 사과하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공의 세덕 / 維公世德

어찌 후하지 않겠는가 / 不其厚而

청강(淸江)과 잠와(潛窩) / 維淸維潛

그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네 / 裕厥後而

공은 훌륭한 가문에서 생장하여 / 公所生長

올바른 교육을 받았으며 / 迺典訓而

더구나 바깥 스승에 나아가 / 況就外傅

서로 보고 선하였네 / 相觀善而

효도와 우애로 정사를 하니 / 孝友爲政

사람들이 흠잡는 말 없었다오 / 人無間而

고을을 다스림에 칭찬이 있으니 / 治理有譽

성상의 표창이 거듭되었네 / 天褒荐而

지위가 낮아 덕에 걸맞지 못하니 / 位卑不稱

이는 진실로 시운이 나빠서요 / 固時婾而

장수를 누리지 못하니 / 壽不登遐

장차 누구를 원망할까 / 將孰尤而

그러나 공의 겉과 속은 / 然公裏襮

완전하고 또 아름다웠네 / 完且美而

하자가 없는 옥과 같으니 / 如玉無瑕

어찌 용이하게 따르겠는가 / 豈容易而

자손들이 줄줄 이어져서 / 子姓繩繩

모두 어짊을 본받으니 / 咸象賢而

천리(天理)를 기필할 수 있음이 / 理之可必

진실로 그러하지 않겠는가 / 不信然而

명문을 청하여 후세에 밝히니 / 謁銘昭遠

효도가 으뜸임을 알겠노라 / 知孝元而

바라건대 후인들은 / 庶幾來者

이 묘소를 공경히 받들지어다 / 肅斯原而

 

 

 

 

 

陜川郡守 李公 諱 善基 墓碣銘

-  藥泉 南九萬 撰

全義之李 鼻祖太師諱棹 有大勳勞於羅麗之際 名德相承 入本朝勳代蟬聯 近代有諱濟臣 世稱淸江先生 文章節行高一時 官北道兵馬節度使 累贈領議政 其季子諱命俊號潛窩 以淸操直節 顯名仁祖朝 選淸白吏 官兵曹參判 贈左贊成 配義城金氏 僉知中樞府事纘祖之女 以萬曆庚戌生公 初名元基字善長 改諱善基 公生有美質 溫粹淸明 潛窩公甚愛重之 命就學于金愼獨齋先生之門 勵志遜業 日有成就 先生亟稱之 遭內外憂 以善喪聞 晩以門庇除景陽察訪 遷宗簿直長陞主簿 歷義禁都事司憲監察 出令歙谷 遞還主司僕簿 時尤齋宋相公長銓曹 與公有同門之舊 習公賢 超守沔川郡 適以詿誤就理 置對得伸 守陜川郡 道臣御史連褒優異 再賜表裏 忤兵使配德山 俄釋 享年僅周甲 卒于漢師之寓舍 初葬楊根先隴之左 越二十五年癸酉 以形家言改窆洪州新村里負子之原 公內行醇備 律已淸苦 非特素性然也 擩染於家庭 薰陶於師友 亦豈少哉 伯氏早卒 丘嫂李氏主家政 公事之甚謹 事無大小 悉稟而行之 雖知舊饋遺 官曹俸入 亦未嘗私之於妻孥 必並歸諸李氏 俾從其意處之 此尤非他人所可能 餘可推知也 常曰士大夫視錢財 當如糞土 以此歷職內外二十餘年 未有纖毫爲子孫計者 室完山李氏 廣平大君章懿公璵之後 典牲主簿佾之女 事公執婦道無違禮 公歿撫庶出如己子 及二子之宰邑 迭享專城之養 常戒之曰臨民惟謹 無使怨及老母也 男長行政三嘉縣監 次行敬聞慶縣監 出爲伯父顯基後 次行敎禦侮將軍 出爲族父碩根後 次行徵通德郞 女適郡守金壽賓 行政一男萬熙 行敬二男萬赫 萬珏 行敎二男萬始時任牙山縣監 萬培 行徵以萬培後 金壽賓一男盛益 內外孫女及曾玄多不悉記 側室五男行敦 行徹 行致 行 行 昔余先子與公居止相近 託以昆弟之義 余在丱角 亦屢承公負劍之詔 及公下世 公之長胤三嘉君念及先誼 謁余以表墟之文 余禮辭而敬諾之矣 文未及成 三嘉君遽成千古 今其胤萬熙又以先志來徵 噫 余實不敏 爲之重謝 拭涕而銘之曰

維公世德 不其厚而 維淸維潛 裕厥後而 公所生長 迺典訓而 況就外傅 相觀善而 孝友爲政

 人無間而 治理有譽 天褒荐而 位卑不稱 固時婾而 壽不登遐 將孰尤而 然公裏襮

 完且美而 如玉無瑕 豈容易而 子姓繩繩 咸象賢而 理之可必 不信然而 謁銘昭遠

 知孝元而 庶幾來者 肅斯原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