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묘역 순례를 다녀와서(기행소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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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10-17 21:30 조회1,180회 댓글0건첨부파일
- cda92c4b_화수회_기행문.hwp (42byte) DATE : 2016-10-17 21:30:28 다운로드 : 304회 2016-10-17 21:3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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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뿌리를 찾아서-장학생 선조묘역 순례 후기.
작성자: 鍾遠
선조묘역 참배 1박2일의 일정을 마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몹시 피곤했던 탓에 버스의 덜컹덜컹 거리는 움직임도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뒤늦게 친해진 탓인지, 내일이 마지막이라는 아쉬운 마음 때문이었는지 장학생들과 새벽 늦도록 수다를 떨었던 탓이다. 피곤한 내 몸을 깨운 건 따뜻하게 데워진 조기탕이 아니라, 아버지의 전화였다. “어땠어, 이야기 좀 해봐”. 평소 아버지께선 자신의 뿌리와 가문에 대해 몹시 궁금해 하셨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아버지는 당신의 할아버지나 그 윗세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때가 되면 도착하는 청강회보를 그토록 꼼꼼히 읽으신 까닭이다. 우리 가문의 가훈(家傳忠孝 世守仁敬)이면서 동시에 현존하는 유일한 세종대왕의 친필이 우리 가문의 조상에게 내린 것이란 기사가 나왔을 때도 아버지는 신문을 스크랩해 냉장고에 붙여두시기도 했다. 일 때문에 함께 여행을 가지 못했지만 못내 궁금했던 사실까지는 숨기지 못하셨다.
청강공과 신흠
절도사공과 지범공에 대한 참배를 마친 후 가장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신흠과 청강공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였다. 신흠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외조부에게서 자랐다고 한다. 신흠의 나이 15세 때 청강공을 찾아와 문하생이 되었는데 신흠의 학문과 문장은 단연 눈에 돋보였을 것이다. 청강공께서도 당대에 여러 편의 문집을 내셨고, 그것이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 잊히지 않고 일제시대에 다시 출판될 정도였으니 그 문장솜씨란 가히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신흠이란 될성부른 떡잎이 청강공과 같은 좋은 토양을 만났으니 양분을 빨아들이는 속도가 남달랐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옛 선조들은 학문을 인격수양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기셨다. 때문에 주자학 입문서로 불리는 ‘근사록(近思錄)’에서 학문은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爲己之學)이라 했다. 남을 위해서 학문을 하는 사람은 남에게서 인정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런 조건이 사라지면 이내 공부를 그만둔다. 하지만 진정한 공부란 남의 시선이나 평가와 상관없이 자신의 인격수양과 내면의 성숙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그것이 학문의 시작과 끝일 것이다. 요즘의 학풍이란 소위 좋은 문장과 좋은 글 강조하지는 않는 것 같다. 특히 과학적 방법을 통해 통계나 프로그램 등 기술적 측면의 강조를 통해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이 학문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좋은 문장보다는 연구결과와 인과관계에만 목을 매게 된다. 과학적 연구방법의 중요성을 무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방법론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중요한 사실을 잊게 만드는 것 같다.
청강공께서 문집을 내시고 신흠이란 당대의 문장가를 길러내셨다는 이야기는 글로 말하고 글로 살아가고 싶은 내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었다. 좋은 문장, 좋은 글을 통해 뛰어난 학문의 세계로 들어간 두 분처럼 내 문장을 돌아보아야겠다. 그리고 그 문장이 나오는 내 삶을 돌아보아야겠다. 문장이란 내 삶의 거울이기 때문에 내 삶이 바르지 못하고 흐리다면 내 문장도 흐려질 것이요, 내 삶이 깨끗하게 바로 서 있다면 내 문장도 밝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아가 내가 연구하는 것과 내 학문의 세계와 궁극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청백리 가문
서종면 수입리에 있는 조상들의 묘는 서울의 유명한 공원만큼이나 정갈하고 깔끔했다. 그리고 조상들의 묘는 하나같이 과하지 않고 청렴했다. 당시 양반들의 위세와 조상들의 벼슬 등을 생각해본다면 약간의 신선함이 느껴졌다. 묘자리와 조상들의 묘 하나하나를 보다보니 문득 한 문장이 머리에 번뜩였다.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으로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한반도의 미를 정리한 구절이다. 조상들의 묘 하나하나가 그러했고, 우리 선조들의 묘역 전체 분위기가 그러했다.
청강공을 비롯하여 우리 가문에는 6명이 청백리에 녹선되었다고 한다. 시대가 바뀐 오늘날의 세대에서도 청렴과 절개가 높은 분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일이 당연시되는데, 당시와 같은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청렴과 절개는 그 무엇보다 귀중히 여겨지는 가치였을 것이다. 그런 시대에 청렴과 절개의 상징으로 꼽히는 청백리에 녹선되었다는 건 가문의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청렴과 절개의 깊이가 이러했을진대 청강공과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분들이 우리 역사에서 자주 회자되어 익숙한 송강 정철, 백사 이항복,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은 따라서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사치스러움을 존중하고 숭상하는 시대이다. 장관이나 국회의원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값비싸고 좋은 차를 타기에 바쁘지 않은가. 재벌들은 도심 속에 성(城)을 쌓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귀족문화 행태가 사회전체를 오염시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형편 생각은 않고, 남들에게 사치스러움을 자랑하려고 명품 백이니 명품 옷 등을 입고 있지 않은가. 엄격한 조선시대라고 하여 사람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저 옛날 선사시대에도 조개와 같은 것으로 장식품을 삼으려고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화려함에의 의지는 인간의 본성 저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간의 마음에 역행하여 자신을 학문으로써 다스리고 청렴과 절개를 지킨 청강공을 비롯한 우리 조상들의 청백리 녹선의 사실은 사치스러움을 권하는 사회를 살고 있는 나와 크게 무관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서당공 할아버지
많은 조상들을 참배했으나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 중 하나는 부훤공의 5대손인 서당공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공부를 하고 싶은 내게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회장님께서 특히 서당공에 대해 설명해주셨던 것도 기억이 난다. 우리 가문에 유일한 대제학 출신이라는 것과 한 번도 하기 힘든 대제학을 네 번이나 지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로 친다면 교육부장관, 서울대총장 등과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학식과 식견을 가져야만 할 수 있는 대제학은 당대 최고의 명예로운 벼슬이었음에 틀림없다. 벼슬 이외에 문집까지 내셨던 것을 통해 짐작건대 앞서 말한 것처럼 문장과 글 솜씨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 대단한 학문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조선에서 손꼽히는 왕인 영조 아래에서 대제학을 여러 번 지냈다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다. 영조는 출신성분에 대한 콤플렉스와 한계를 딛고 숙종 때의 탕평책 실패로 인한 정국의 혼란을 바로잡았고 그것이 정조에까지 긍정적 영향을 끼친 것처럼 보인다. 정조는 초계문신제라고 하여 그 스스로가 선생이 되어 신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의 학식 수준을 뛰어넘어 가르칠 수준이 되었다는 것은 정조의 정치력뿐만이 아니라 학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영조에게 그 공을 돌릴 수 있는데, 정조가 큰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조선후기로 가는 길목을 잘 다진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훌륭했던 영조 밑에서 대제학을 여러 번 지냈다는 것은 당대가 낳은 학자일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손꼽힐만한 인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문득 우리 조상들에게는 일정부분 고집스러움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남과 어울리지 못하는 부정적 의미의 고집스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청렴함에의 의지, 정직함에의 의지, 학문에의 의지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의지(Willingness)는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기 보다, 어떤 것에의 의지(Willingness to ~)가 중요하다. 사람을 건강하게도 하지만 일정 시점에서 타락시키는 것들이 프로이트와 니체가 밝혀낸 성에의 의지, 힘에의 의지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조상들은 그러나 청렴함에의 의지,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역행하는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길에 정진하셨다.
신도비
선조들 묘역에 참배하는 내내 죽은이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신도비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일일이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신도비가 없는 장소를 찾기가 힘들었다. 사무장님 말씀이 신도비는 친하지 않고서야 써줄 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신도비란 돌아가신 분의 생전 행적을 잘 알 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뭇 백성에게 귀감이 될만한 것이어야 한다. 누가 방탕하게 살다 간 사람의 죽음을 명예로이 기리겠는가. 신도비가 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근처에 있어 백성들로 하여금 귀감이 되도록 한다는 이야기가 과연 그럴듯하게 들린 이유이다. 오늘날 추도사도 가장 그와 가깝고 인격적으로 절친했던 사람이 많은 사람들 앞에 죽은 이의 명복을 기리며 그의 삶을 기억하는 행위로써 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러한 죽음이 생을 참 인간답게 살아갔을 때 그 장례식은 슬프지만 영광스럽다. 그렇기에 앞서 이야기한 청강공에 대한 신도비는 굉장히 인상깊었다. 부모를 여의고 청강공의 문하생이 되어 자신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신흠이 청출어람하여 청강공에 대해서 쓴 이야기는 양반사회의 멋스러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겠다.
또한 우리 집안에서는 유일하게 현직에서 정승을 지낸 서화공에 대한 신도비도 기억에 남는다. 서화공은 민심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주는 등의 치적이 많고 일생을 가난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서화공께서는 그림을 잘 그렸다고도 전해지는데, 이러한 멋스러움이 대사헌-이조판서-병조판서-우의정 등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사치스러움과 멀게 살게 한 이유가 아니겠는가 생각해보았다. 그런 서화공의 덕을 흠모하여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가장 중요한 학자이자 정치인인 송시열이 그의 신도비를 직접 썼다고 하니 여기에 내 사족을 덧붙이는 것이 되려 서화공의 덕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으면 누가 내 신도비를 써줄 것인가. 그리고 내 친구 중 내가 신도비를 써주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 나를 가장 잘 알고 나와 뜻이 같은 나의 지음(知音)은 누구인가. 동시에 나는 누구의 지음(知音)이 되어주고 있는가. 머리 속으로 평소 좋아하는 시를 떠올렸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救命袋)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학생으로 공부를 잘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있는지가 아닐까. 수많은 우리 조상들의 신도비를 바라보며 나에게 있어 진정한 친구관계 진정한 인격적 관계는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1박 2일이라는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다짐
주말에는 몸이 더 무거워지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주말에 1박2일을 가는 것이 평일을 바쁘고 열심히 보낸 내게 처음엔 몹시 힘들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자 내 삶의 뿌리인 조상들의 행적을 하나하나 밟아나가고 그분들의 삶을 기억하는 것이 굉장히 의미있는 여정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지 않아서였다. 처음 참배했던 절도사공과 지범공의 묘를 통해 나는 이 여행이 끝나고 난 뒤에도 나의 매일의 삶에 영향을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1박2일이 끝날 때쯤에 그것은 확신이 되어있었다. 이제 친해진 우리 종원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못내 아쉬웠다. 그만큼 그 전날 새벽을 지새워가며 했던 이야기가 뜻 깊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남이 아니라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의식이 그만큼 빨리 서로에게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헤어지며 우리는 서로 주어진 자리에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말로 하지 않더라도 헤어질 때의 꽉 잡은 악수가 그 말을 대신 전해주었다.
훌륭한 선조들의 생애와 치적들을 배웠지만 그것에서 만족하고 내 삶을 무책임하게 산다면 그것은 내 삶에서 선조들의 삶을 분리시키는 행동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분들의 숨결이 나에게 살아있도록 하게 하는 것, 그것을 통해 그분들의 숨결이 살아나도록 하게 하는 것, 그것이 선조들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사는 것일 것이고 그분들의 삶이 참되고 의미있도록 하는 길일 것이다. 1박2일의 여정은 못내 아쉬웠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아버지와 같이 오도록 해야겠다. 내 부족한 문장과 글로 1박2일간 느꼈던 벅차올랐던 기억을 전달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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