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公)께서는 1536년 7월 24일 오시(午時)에 서울 청파 반석방(盤石坊)<현 서울역 서쪽 중심 남북 축선(軸線)으로부터만리동(萬里洞) 고갯마루=산능선 사이의 행정구>에서 출생하시고 1583년 10월 6일 향년(享年) 48세에 돌아가셨다. 본관(本貫)은 전의(全義), 자(字)는 몽응(夢應), 호(號)는 청강(淸江), 아버지는 수경상우도병마절도사(守慶尙右道兵馬節度使)를 지내신 이문성(李文誠)이시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단양 우씨(丹陽禹氏)이시고, 부인(夫人)은 증 정경부인(贈 貞敬夫人) 목천 상씨(木川尙氏)이시다.

 

1558년(23세)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1564년(29세)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임명되었고, 1566년(31세)에 한원(翰院)에 들어가 검열(檢閱)을 거쳐 대교(待敎) 봉교(奉敎)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으로 승진되고, 이어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형(刑), 공(工), 호(戶) 삼조(三曹)의 좌랑(佐郞)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전직하여 국사편수의 직책을 겸하여 명종실록의 찬수(撰修)에 참여하였다. 1569년(34세)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北京)을 왕복하였으며, 1570년(35세)에는 예조정랑(禮曹正郞) 지제 교(知製 敎)로 임명되었다가 곧 울산부사(蔚山府使)로 제수되었고, 1572년(37세)에 집에 돌아왔다. 1573년(38세)에 군기시 첨정(軍器寺 僉正), 성균관 사예(成均館 司藝),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예조정랑(禮曹正郞)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고,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호서(湖西)지방을 순찰하고 돌아와 성균관 직강(直講)과 내섬시 첨정(內贍寺 僉正)을 거쳐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출사(出仕)했다. 1574년(39세) 직강(直講)으로 돌아왔다가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 전임되었다가 한성부 서윤(漢城府 庶尹)이 되었을때 어머니(母夫人)께서 별세, 1575년(40세)에 아버님 절도사공도 별세하였다.

 

1578년(43세)에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을 거쳐 진주목사(晋州牧使)가 되었다가 1579년(44세)에 사직하고 2년동안 집에서 한가히 보내다가, 1580년(45세) 겨울에 강계부사(江界府使)가 되었고, 1582년(47세)에 가선대부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겸 경성도호부사(嘉善大夫 咸鏡北道 兵馬節度使 兼 鏡城都護府使)가 되었고, 1603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大匡輔國崇錄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 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師)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은 5세에 글을 읽고, 7세때 정승(政丞)의 연구(聯句)에 「조비청천부(鳥飛靑天浮) 청천고하지(靑天高下知) = 새가 날아 저 푸른 하늘로 떠오르니 푸른 하늘의 높낮이를 알겠구나」의 시를 지어 찬탄(讚嘆)을 받았고, 당시의 사람들이 놀랍다는 말을 하고, 8세에 조부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예제(禮制)에 어긋남이 없었다.

 

차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더니 이미 자기의 목표를 스스로 우뚝한 곳에 세우고 학문에 뜻을 두고 힘쓰니 당시의 큰 선비인 남명 조식(南冥 曹植)이나 용문 조욱(龍門 趙昱) 같은 분들이 모두 크게 탄복하였다.

 

벼슬길에 오른 뒤로는 명망이 온 천하에 떨치었고 동관(彤管-붉게 칠한 붓대통, 즉 교정을 말함)을 잡고 사관(史官)으로 근무할 때는 옳고 그름을 두루 살피어 티끌만큼도 조리에 맞지 않은 기록을 남긴 일이 없으니 모두가 눈치로 바로잡아 주기를 기대할 뿐이었으며 이렇게 명성이 높아지자 꺼리고 시기하는 사람이 생겼다.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연경(燕京)에 들어갈 때도 솔선수범하여 입은 옷 그대로에 하인 한 사람과 책 괴짝, 옷 보따리 만 갖고 단출하게 갔다가 돌아오니 역관(譯官)이나 서리(胥吏)나 딸린 하인이 스스로 조심하여 단속하지 않아도 규율이 바로 잡혔다.

 

울산부사시 축낸 관곡 7만곡(1곡(斛)은 10말)을 회수하여 울산 백성들이 10년동안 세금과 부역을 모르고 지내게 하였다.

 

진주목사로 있을 때 엄정하게 일을 처리하므로 토호들이 자기네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간사한 아전들을 시켜 몰래 병부(兵符)를 도적질하여 병부없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으므로 사직하고 집에 돌아왔다.

 

공이 회현방 현 서울 중구 회현동(會賢坊 現 서울 中區 會賢洞) 집에 돌아와서는 문을 닫고 출입을 하지 아니하면서 그 거처하는 방에 귀우당(歸愚堂)이라는 액자(額子)를 써붙이고 뜰에 화초를 심고 기르면서 유유자적 하는 평상심으로 만권서(萬卷書)를 쌓아두고 독서에 몰두하며 연구에 전심하고 그 가운데에서도 한적한생활을 즐길 따름이었고, 2년동안 비록 안부를 물으러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도 모두 사절하였다.

 

두서너분의 재신(宰臣)이 공의 심경(心鏡)을 이해하고 복직을 천거하니 선조(宣祖)께서는 공의 재주를 잘 아시어 두 계급을 뛰어넘어 삼품직(三品職)으로 기용하여 강계부사(江界府使)로 임명하였다. 강계부사로 부임하여 낡은 제도를 일신시키고 성루와 보루를 정비하여 훈련을 강화하고 군사의 사기를 진작시켰던 바 순찰한 어사가 치적이 가장 훌륭하다고 왕께 보고하니 선조(宣祖)임금께서는 특별히 옷 한 벌을 하사하시어 총애하는 뜻을 표시하시고 부월(斧鉞-왕이 출정하는 장군에게 주는 무기의 일종)을 주어 북병사(北兵使)를 삼았다.

 

때마침 북쪽지방에 흉년이 들어서 나라에 바치는 물품을 줄이고 기생을 두는 것을 물리쳤으며 창고에 군량을 저축하여 군수물자를 풍부하게 하며 요새지역을 보수하며 척후를 강화하여 적의 침입을 경계하는 등 모든 필요한 시책을 다하였다.

 

1583년 봄에 북쪽 오랑캐 이탕개(尼湯介)가 이웃 추장(酋長)들과 연합하여 갑자기 경원진(慶源鎭)을 덮쳐 함락하였다. 부사 김수(府使 金鐩)가 패전하여 달아나니 적군이 잇따라 아산(阿山) 안원(安原)등의 보(堡-방어진지)를 함락시키고 나아가서 종성(鍾城)을 포위하였다. 공(公)이 군사(軍士)를 모아 온성부사 신립(穩城府使 申砬) 부령부사 장의현(富寧府使 張義賢) 종성판관 원희(鍾城判官 元熹)와 휘하 장수 신상절(申尙節) 김우추(金遇秋) 변국간(卞國幹) 이종인(李宗仁) 김준민(金俊民) 권홍(權洪) 류중영(柳重榮)과 더불어 적군을 크게 무찔러서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잇따라 군사를 몰아 그 소굴을 쳐들어가 수백여 굴(窟)을 불살라 버리고 수백급을 참획(斬獲)하였다. 적들이 양식과 사기가 다 떨어지니 별안간 태도를 바꿔 관문(關門)으로 찾아와서 다시 부속되기를 청하였다.

 

처음에 경원(慶源)에서 패하였다는 보고가 조정(朝廷)에 들어오자 공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공(公)이 겁을 내어 적을 치지 못하였다고 공박하여 법으로 얽매려 하였다. 선조(宣祖)께서는 공(公)의 공적이 매우 클 것으로 생각하시어 비변사(備邊司)에 하문(下問)하였으나 비변사 역시 헐뜯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마침내 『패군한 장수 김수(金鐩)를 행형(行刑)할 때에 조정에서 내린 표신(標信)을 3일동안 묵혀두어 임금의 명령을 거역하였으니 마땅히 사형(死刑)에 처하여야 한다』는 율문(律文)을 적용하기로 의론이 된 것을 선조께서 특별히 사형(死刑)을 감면하여 인산진(麟山鎭-의주 남쪽 4리에 있는 보)으로 귀양 보냈는데, 이해 10월 6일에 복사(鵩舍-귀양살이 하는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1583년 죄인의 몸이 되어 잡혀 돌아올때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후일 오성대감)이 청년시절이었는데(28세) 공(公)이 나이를 초월하여 아주 친하게 사귀는 사이였으므로  그분이 공이 잡혀오는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공(公)이 손을 잡고 희롱하여 말하기를 『네가 내가 북쪽으로 떠날 때 지어준 시의 구절 가운데 「문자로 옮겨 놓으면 긴 성을 이루겠다. -추이문자작장성(推移文字作長城)-장성(長城)은 살육(殺戮)을 뜻함」라는 대목이 있더니 오늘날 드디어 젊은 선비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이 되었구나』하고 이어서 독사절목(讀史節目) 사서(史書)를 읽는 조목(條目)에 대하여 논(論)하였고 다른 일에는 언급함이 없었다.

 

유배지(流配地)로 가서 항상 한칸 집에 거처하면서 거리에 나다니지 않았으며 그 고을에서 가져다 주는 음식은 물리치고 받지 아니하였다.

 

공의 맏아들 기준(耆俊)이 공(公)보다 다섯달 앞서 세상을 떠나니(29세) 공이 슬퍼한 나머지 병이 들었다. 둘째아들 수준(壽俊)이 지성으로 간호하였으나 음 10월 6일 돌아가셨으며 다음해 정월에 서울로 운구(運柩)하여 4월에 양근군 서종면 수회리 현 양평군 서종면 수입3리(楊根郡終面 水回里 現 楊平郡 西宗面 水入3里) 서(西)쪽의 언덕에 묘소(墓所)를 모시었다가 을묘(1615)년 12월에 좌향만 바꿔 현재의 자리(수입리 산6) 간좌(艮坐)에 양위분을 이장하였다.

 

공은 풍모(風貌)가 괴걸(魁傑)하고 풍채(風采)가 헌앙(軒昻)하며 금도(襟度-포용력)가 넓고 빼어나며 기국(器局-도량과 재간)이 우뚝하고도 바로 잡혔고 큰 눈과 여유있는 입, 긴 수염은 바라만 보아도 활달한 대인의 틀이 잡힌 훤칠한 기상이었다고 기록에 전한다.

 

집안 살림이 부유하였으나 벼슬살이 하면서부터 공이 받는 녹봉(祿俸)은 말에 실은대로 가져다가 모두 가난한 일가에게 나누어 주니 집안에 아무것도 없고 밥상의 반찬이 두가지가 고작이었다 한다.

 

어려서부터 세속의 변화에 따라 태도를 굽혔다 폈다 하는 일이 없었으며 뜻을 굽히면서 까지 남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 없었고 서로 기개가 통하는 사람만을 사귀되 친구가 급한 일을 당하면 함께 도와 뒷수습에 나서고 걱정스러운 일을 당했을때에는 함께 근심하였다고 한다.

 

자제들에게 가르치기를 『사람이 진실로 부귀하고 현달할 마음을 가진다면 차라리 학문을 닦지 않는것이 좋을 것이다.인간답게 될려면 마땅히 재물을 분토(糞土)처럼 보아야 하느니라』고 하였다.

 

기절(氣節)과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얻어 “청강선생(淸江先生)”이라고 불리웠으며 청강집이 전하여 있는데 글의 구성이 웅장하고 신기하여 스스로 오묘한 경지를 개척하였으며 글씨도 행서, 전서, 초서, 예서에 모두 능하셨다고 한다.

 

공(公)의 지기(知己)로서 율곡 이이(栗谷 李珥), 송강 정철(松江 鄭澈), 우계 성혼(牛溪 成渾), 졸옹 홍성민(拙翁 洪聖民), 퇴우 이정암(退憂 李廷馣),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등이 있어 공을 기리고 글을 지어 덕행을 추모하였다.

 

특히 우리 후손은 족보체제(族譜體制)로 계제식(階梯式)을 처음으로 창안(創案)하시어 실제로 본종(本宗)의 족보편찬(族譜編纂)에 적용하여 누대(屢代)에 걸쳐서도 무리없이 편찬(編纂)할 수 있는 시범(示範)을 보이셨으며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모든 족보(族譜)의 체제(體制)로 유지(維持) 편집(編輯)되며 또 세종대왕(世宗大王)이 효정공(孝靖公)께 하사(下賜)하신 “가전충효(家傳忠孝) 세수인경(世守仁敬)” 어필(御筆) 팔자(八字)를 우리 전의이성(全義李姓)의 가훈(家訓)으로 삼도록 족보(族譜) 권두(卷頭)에 등재(登載)하셨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상촌 신흠(象村 申欽)이 공의 신도비문(神道碑文)에 병명(幷銘)하기를, 「손수 말 달리지 않고 활쏘는 예의도 잘 모르면서 대화로 적을 물리치고 주장을 관철하였으니 이는 두정남(杜征南)의 짝인가? 불러도 오지 않고 물리쳐도 가지 않으니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으로도 그 뜻을 빼앗지 못하였으니 이는 급장유(汲長孺)의 무리인가? 그 그릇인즉 중한 지위를 맡을만 하고 문장인즉 강을 다스려 도랑으로 쏟아 부은듯 한데, 하늘을 얻은 자에게는 온전한 수명을 짝해 주시지 않은 것을, 봉록(俸祿)은 비록 때에 어그러졌으나 위에 밝은 임금이 계시고, 밝은 임금이 위에 계시니, 공이여! 어찌 원망하리오. 저 공의 지위를 꺾고 참소(讒訴)한 자들을, (그들도) 이미 함께 흙으로 썩어 다하였음이여. 무릇 어떻게 하여야 선생의 아름다운 빛은 오래도록 향기로 남아 환하고도 길이길이 여운을 남기게 할 것인지」라고 하였다.

 

문무겸전(文武兼全)한 선비상을 기리며추모하는 뜻을 표현함이라 사료된다.

 

가평(加平)의 미원서원(迷源書院), 청원(淸原)의 송천서원(松泉書院), 울산(蔚山)의 학호서원(鶴湖書院)에 배향(配享) 되었으나 고종(高宗) 때 대원군(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서원 철폐정책으로 훼철(毁撤)된 후 송천서원만 복원되었다.

 

청강공(淸江公)은  생시에 청허(淸虛)하고 절제(節制)있는 지조(志操)와 언행(言行, 강고(强固)하고 청빈(淸貧)했던 생활이 가상(嘉尙)히 평가되어 사후(死後) 선조조(宣祖朝) 때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되었으며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도 사적(事蹟)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4代孫 天浩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