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이씨 시조께서는 고려 태사로 이 도(李 棹)라는 어른이시니 첫 이름은 치(齒)이시다. 선대로부터 공주에 사시며 금강의 수운을 관활하시는 이고장의 호족으로 지극히 효성하며 매우 후덕하여 널리 은혜를 베푸시니 고을 백성들의 명망과 승앙을 받았으며 금강북쪽 석방현에는 당나라 주호선사가 점지한 선대를 모신 묘소가 있다.

 

고려 태조가 남정길에 올라 금강에 이르렀을 때 마침 대홍수로 강물이 불어 넘쳐 건너지 못할 때 이를 호섭하여 전군을 무사히 도강시킨 공으로 이름을 도(棹)라고 하사하고 응양군대장군을 삼았으며 고려개국과 삼한통일을 좌리하시어 고려통합삼한개국익찬공신 2등으로 책훈되고 전산후(全山侯)로 봉작되었으며 벼슬이 삼중대광태사에 이르고 영지로 분봉된 전의현(全義縣)에 소거하셨으며 이성산성(李城山城)에는 공의 유허가 전래하며 시호는 성절공(聖節公)이시다.

 

후손들은 고려 개국공신의 후예로서 시조께서 소거하신 전의(全義)를 후세에 씨족의 출사지를 관향으로 명명되어 이어와 천여년의 후사를 이어온 벌족이며 7세조 증서시중문하평장사 동암수공(東巖) 이 천(李 仟)께서는 수군의 명장이시며 응양대장군으로 몽고의 침입에 항쟁하여 서해를 방어하여 강화도로 몽진한 고려조정을 수호하고 아산만 온수현에서 몽고군을 무찌르는 대첩을 이룩하여 대몽항쟁 승전의 전기가 되었고 남녀소려 100여인을 구출하였다.

 

동암수공은 아들 3형재를 두시어 큰아들 성균관대사성공 이자원(李子蒝)은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파조이시며 둘째아들 첨의정승 문장공 이 혼(李 混)고 셋째아들 선부전서공 이자화(李子華)는 선부전서공파(選部典書公派) 파조가 되시어 후손들을 3파로 대별한다.

 

그 후손 문의공(文義公) 언충(彦沖)과 효정공(孝靖公) 정간(貞幹)의 후손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명문가로서의 인맥을 이루었다. 언충은 고려 고종 때의 장군 천(仟)의 손자로서 충렬·충선·충숙·충혜왕의 4대에 걸쳐 벼슬한 명신이며 정당문학·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 정간은 천의 현손이며 언충의 재종손으로 세종 때 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노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임명되고 왕으로부터 사연(賜筵) 및 궤장을 하사받았다. 또, 죽음에 임박했을 때는 세종이 직접 거동(擧動:임금의 행차)해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 여덟 자의 어필(御筆)을 내려, 이후 전의이씨는 모두 이 여덟 자를 가훈으로 삼고 있다. 전의이씨는 조선에서만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 7명, 대제학 2명, 청백리 8명, 공신 8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4만 1071가구에 13만 32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