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공 휘 윤순 묘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

우의정(右議政) 성세창(成世昌)1)이 지음

 

후(侯)2)의 휘(諱)는 윤순(允純)이고 자(字)는 일지(一之)이다.

전의이씨(全義李氏)는 망족(望族)3)이니 원조(遠祖) 휘(諱) 도(棹)는 고려의 조정을 섬겨서 통합삼한개국원훈(統合三韓開國元勳)이니, 이로부터 관면(冠冕,벼슬)이 계속 연이었다. 효정공 휘 정간(孝靖公諱貞幹)에 이르러서 공은 어머니 섬기기를 지극한 효도로 하여 향수(享壽)가 100세를 넘어서 세종조에 특별히 포상의 아름다움을 더하여서 일시의 공경(公卿)이 노래와 시(詩)로 그를 찬미하였으니, 이분이 후(侯)의 증조이고, 효정(孝靖)이 휘(諱) 사관(士寬)을 낳으니, 관직이 부윤(府尹)에 이르렀으며, 휘(諱) 서장(恕長)을 낳으니 광묘조(세조)에 조책적개공신(朝策敵愾功臣)으로 관직이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이르렀고, 군수 송처공(宋處恭)의 여식을 취(娶)하여서 후(侯)를 낳았다.

 후(侯)는 천성이 순수하고 청렴하고 공변되고 정직해서 성화(成化) 연간에 선전관에 선정되었고, 홍치(弘治) 원년(1488. 성종19)에 정주판관(定州判官)에 제수되었으며, 임기가 차자 충익도사겸 사헌부지평(忠翊都事兼司憲府持平)으로 옮기고, 또 황해 도사(黃海都事)에 제수되었다가 한성 판관(漢城判官)과 장예 사의(掌隸司議)에 전직되었고, 곤양 군수(昆陽郡守)에 올랐다. 정덕(正德) 4년(1509. 중종4)에 제용 첨정(濟用僉正)에 체질되었고, 또 고성 군수(高城郡守)에 제수되었다가 임기를 마치고 군자 첨정(軍資僉正)에 제수되었으며, 충훈 경력(忠勳經歷)을 거쳐서 광흥수(廣興守)를 한지 15년에 사도 부정(司䆃副正)에 오르고, 내자시(內資寺)와 사재감(司宰監) 부정(副正)에 올랐다.

임소(任所)에서 명성과 실적이 있었으니, 세 곳의 군읍(郡邑)을 맡은 곳에서 백성들이 유애비(遺愛碑)를 세웠고, 집에 있으면 이이(怡怡)4)하였으며, 향리의 일가들이 모두 그 덕을 배부르게 받았다.

가정(嘉靖) 3년(1524. 중종19) 9월 11일에 병을 얻어서 서거(逝去)하니, 향년(享年)이 75세이었다. 군수 남임(南任)의 여식에게 장가들어서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 인손(仁孫)은 사도 주부(司主簿)이고, 장녀는 군자 판관(軍資判官) 황찬(黃瓚)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유학(幼學) 이태수(李台壽)에게 시집갔다. 이 해에 금천(衿川)의 마장원(馬場原)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공의 묘소는 원래 금천(衿川)에 봉안하였으니, 오늘의 시흥(始興) 마장원(馬場原)이다. 이미 400년이 지난 근래에 경시연(京市延) 무려리(袤閭里)가 유택(幽宅)을 침범하여 거의 보존하기 어렵게 되어서 단기 4300년(1967) 봄에 부득이 양평 수입리의 현지에 이장하고 삼가 의물(儀物)를 갖추고 묘도(墓道)를 새로 닦았다. 그런데 묘비가 오랜 세월로 인하여 글자가 마모되어서 해독할 수가 없었으니, 이것이 유감이었다. 이에 원문(原文)을 개각(改刻)하여 표석을 세웠으니, 추원(追遠)하고 잊지 못하는 작은 정성이었다. 15세손 경세(慶世)는 삼가 기록하였다.

 

<註>


1) 성세창(成世昌) : 본관은 창녕. 자는 번중(蕃仲), 호는 돈재(遯齋). 아버지는 예조판서 현(俔)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며, 이심원(李深源)에게 역학(易學)을 배웠다. 1501년(연산군 7) 사마시에 합격했다. 1504년 아버지가 죽은 뒤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자 그도 영광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사직서 참봉에 임명되었고, 1507년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흥문관 정자에 등용된 뒤 저작・박사・정언 등을 지냈고,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집의・사간・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 등을 역임했다. 1517년 흥문관 직제학으로 있을 때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들이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려 하자 반대했으며, 1519년 병으로 사직하여 기묘사화의 화를 피했다. 다시 등용된 뒤 강원도관찰사・형조참판을 지내고 주문수(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예조참판・이조참판을 지내며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신진사류들의 등용에 힘썼다. 1530년 김안로(金安老)를 논척(論斥)하다가 평해에 유배되었으나, 1537년 김안로가 허항(許沆)・채무택(蔡無澤)과 함께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자 유배에서 풀려나와 한성부 우윤・공조판서・형조판서・이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545년(인종 1) 좌찬성・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해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중추부(中樞府)의 한직으로 좌천되었다가 황해도 장연(長淵)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567년(선조 즉위) 신원되었다. 문장에 뛰어나 많은 외교문서를 작성했고,글씨・그림・음률에 뛰어나 삼절(三節)로 불렸다. 저서로 <돈재집>・<식료찬요 食療纂要>가 있으며, 글씨로 <성이헌여완갈 成怡軒汝完碣>・<부사 정광보 묘비 府使鄭光輔墓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2) 후(侯) : 사대부들 사이에 서로 높이어 부르는 말.

3) 망족(望族) : 명망이 있는 집안.

4) 이이(怡怡) : 즐거워하는 모양. 화목한 모양.

 

右議政 成世昌 撰

侯諱 允純 字 一之 全義望族 遠祖諱棹 事麗祖(朝) 統合三韓開國元勳 自是冠冕相聯 至孝靖公諱貞幹 事母至孝 年踰百歲 英廟特加褒美 一時公卿 歌詩頌之寔侯曾祖 孝靖生諱士寬 官至府尹 生諱恕長 在光廟朝策敵愾功臣 官至司憲府大司憲 娶郡守宋處恭女 生侯 侯天性純粹 廉公正直 成化年間 選補宣傳官 弘治元年 拜定州判官 秩滿 遷忠翊都事兼司憲府持平 又拜黃海都事 轉漢城判官掌隸司議 陞昆陽郡守 正德四年 遆爲濟用僉正 又拜高城郡守 滿秩 拜軍資僉正歷忠勳經歷 廣興守十五年 陞司䆃副正 轉內資司宰副正 所地有聲績 三典郡邑民有遺愛 處家怡怡 隣里宗族 咸飽其德 嘉靖三年 九月 十一日 以疾逝 享年七十五 娶郡守南任之女 生一南二女 南仁孫 司䆃主簿 女長 適軍資判官黃瓚 次適幼學李台壽 是年葬于衿川馬場原 子坐午向之原云

 

公之墓所 元來奉安于衿川 今始興馬場原 已經四百星霜 而近來京市延袤閭里 侵近幽宅 幾乎難保 歲在檀君紀元四千三百年 丁未春 不得已遷窆于楊平水入里現地 謹具儀物 墓道一新 而墓表碑因歲久字泯 不能瞻讀 是爲遺憾 亦因原文改刻 而竪之以表 追遠不忘之微忱云爾 十五世孫慶世 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