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곡공 휘 인손 묘

우리 전의이씨는 태사공(太師公) 휘 도(棹)께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을 통일한 뒤로부터 대대로 관족이 되어 내려오다가 11세 효정공(孝靖公) 휘 정간(貞幹)에게 이르러 백세나 되는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기어서 세종께서 크게 포상을 내리시고 정문(旌門)을 세워 그 순효(純孝)를 기리시었으니 이 어른이 공의 고조(高祖)이고 증조(曾祖)는 한성 부윤를 지냈고 영의정 전성부원군(全城府院君)으로 추증된 휘 사관(士寬)이니, 아들 여섯이 모두 등과하였는데 그 막내가 적개공신(敵愾功臣)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고 전성군이며 시호는 양간공(襄簡公)인 휘 서장(恕長)이니 공은 이 어른의 손자이시다.

 

공의 휘는 인손(仁孫)이요 자(字)는 종효(宗孝)이니 처음에 음사로 장사랑(將仕郞)에 제수되었다가 종사랑(從仕郞)으로 승진되었고 곧 문공(文功)으로써 충의위(忠義衛)에 속하게 되어 수의(修義) 부위(副尉)가 되었고, 십팔개월(十八個月)만에 어모장군(御侮將軍)에 까지 승진되었다. 여러 번 사용(司勇), 사맹(司猛), 사정(司正), 사직(司直) 등의 벼슬을 거치어, 정덕 2년(1507 중종2년)에 비로소 동반의 통훈대부(通訓大夫) 위계(位階)로 옮겨 성환(成歡) 금천(金泉) 양도의 찰방(察方)을 지냈고, 북부 사도(司導), 풍저(豊儲) 남부(南部) 전옥(典獄) 오사(五司)의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네번이나 현(懸)의 수령이 되었으니 문경(聞慶), 흡곡(谷), 청양(靑陽), 고령(高靈)이었고, 한 번의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천성이 소박하며 지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었고 제사는 정성껏 모시었으며, 벼슬길에서는 어진 마음으로 백성을 어루만지고 몸가짐을 삼갔으며 종족과 향당은 모두 후하게 대우하였다.

 

아들이 없어서 재종형되는 양주 목사(楊州牧使) 부군(府君) 휘 공달(公達)의 셋째 아들인 휘 문성(文誠)을 양자로 삼으셨으니 이 어른이 나의 선군이시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국가에서는 그 직품이 공경의 서열에 있으므로 선작을 추서(追廻)하여 공의 아버지되시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 부군(府君) 휘 윤순(允純)에게는 통정대부(通政大夫 )형조 참의를 추증하고 어머니인 한성 서윤 휘 임(任)의 딸인 숙인 의령남씨(宜寧南氏)를 숙부인(淑夫人)으로 삼고, 공에게는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 겸 의금부사를 추증하였으며, 비(騙)인 문화유씨(文化柳氏)를 정부인(貞夫人)으로 삼고, 유사로 하여금 매달 주육을 내리도록 하였다. 부인은 또한 우리 비조(鼻祖)와 같은 공신인 대승(大承) 차달(車達)의 후손이고, 정헌대부(正憲大夫) 중추원사를 지낸 은지(殷之)의 증손이며 좌리공신(佐理功臣) 문성군(文誠君) 휘 수(洙)의 손녀이고, 서흥 도호부사(瑞興都護府使)를 지낸 휘 계손(季孫)의 딸이며 의주 목사(義州牧使) 장공(張公) 맹창(孟昌)의 외손이다. 부덕을 닦아 규범을 바르게 실천하여 아랫사람을 신칙하고 가사를 잘 정리하며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기고 족친들과 접촉하는데 화기가 애애 하였으며 손님을 받들고 가장을 섬기는데에는 조심성있게 행동하니, 그 때 사람들이 내조하는데 가장 슬기롭고 어진 부인이라고 칭송하면서 모두 복종하였다.

 

공은 성화13년(1477 성종8) 정월 7일에 출생하시고 가정22년(계묘1543) 6월 19일에 정침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수가 67세이시고, 부인은 성화 17년 신축년(1481) 10월 17일 출생하시어 공보다 21년 후인 가정 42년 계해11월 7일에 별세하시니 수가 83세였다.

 

공의 묘소는 일찍이 금천현(지금의 과천과 시흥일대) 관악산(冠岳山) 북(北)쪽 마장원(馬場原)에 있었는데, 부인이 돌아가시자 그 산소의 왼쪽을 따고 부장(蟄葬)하였다. 이곳은 참의 부군과 남부인의 위 아래 산소의 뒤인데 여기에서 선군께서는 시려(侍廬)하시였다. 선군(先君)께서 양친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었으므로 공과 부인께서 끔찍하게 사랑하시어 양자라는 것을 전혀 잊으시고, 기출(己出) 이상으로 사랑하시었다.

 

비(騙) 정부인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즉 부령(富寧) 도호부사(都護府使) 휘 예손(禮孫)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시었는데 딸은 생원 김종(金琮)에게 시집가서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광윤(光潤)이고 맏딸은 송유경(宋惟敬)의 아내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제신(濟臣)은 선무랑(宣務郞) 상붕남(尙鵬南)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기준(耆俊) 수준(壽俊) 구준(耉俊) 명준(命俊)이요, 딸은 어리다. 기준(耆俊)은 2남을 낳았으니 중기(重基)와 후기(厚基)이다.

 

아버지께서 일찍이 산소의 비석에 쓰려고 돌을 마련하여 놓았으나 글을 쓰지 아니하셨으니 대체로 기다림이 있었는 듯하며 또한 연유(緣由)가 있어 일을 서두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신(濟臣)이 태어나면서부터 길러 주시고 키워주시어 이렇게 자립하기에 이르렀고, 몹시 가난하여 의식이 없을 정도는 아니므로 전혀 무지각 할 수는 없으니, 이것이 모두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가르치신 바 아님이 없어, 이만한 큰 음덕을 주시었으니 이 모든 것은 하늘이 다하도록 울고 호소하여도 도저히 보답할 길이 없다.

 

생전의 역정이나 행치(行治)를 지나치게 화려하게 할 것은 아니로되, 산소 앞에 이 묘표(墓表)를 바치어 나의 지원(至願)을 길이길이 고(告)하고자 하노니 만세의 뒤까지라도 여기 덕인(德人)이 묻히셨으며 또 흠앙(欽仰)하고 공경할 바가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모년 월 일에 손자 중훈대부(中訓大夫) 행 사헌부 지평(持平) 지제교(知製敎) 겸춘추관 기주관사

이제신(李濟臣)이 백배하고 삼가 지음

 

 

 

我全義之李○自太師諱棹○佐麗祖統三韓○世爲官族○十一世至孝靖公諱貞幹○善養百歲母○世宗大加褒○擢以旌純孝○寔公高曺○曾大父漢城府尹○贈領議政○全城府院君諱士寬○有六子○登科○其季曰敵愾功臣司憲府○大司憲○全城君襄簡公諱恕長○公其孫也○公諱仁孫○字宗孝○初伊蔭○授將仕郞○陞從仕郞○旋用文功○屬忠義衛○爲修義副尉○積十八○陞至禦侮將軍○屢爲司勇司猛司正司直等職○正德二年始授東班○通訓大夫資○歷成歡金泉兩道察訪○北部司導角儲○南部典獄○五司主簿○四佩縣符聞慶卵谷靑陽高靈也○一贇憲臺監察也○天性樸 ○醇慤○奉親養祭以誠○臨官守撫惟謹○宗族鄕黨○咸以恩厚遇之○無嗣○以再從兄楊州牧府君諱公達第○三子諱文誠○爲後○卽我先君也○登武科○官至兵馬節度使○國家以職在卿秩○追錫先爵○贈公考通訓大夫○司宰監副正府君○諱允純爲通政大夫○刑曹□議○騙漢城庶尹諱任之女○淑人宜寧南氏爲淑夫人○贈公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封騙淑人文化柳氏○爲貞夫人○令有司月致酒肉○夫人亦我鼻祖同功○大承車達之後正憲中樞院使殷之之曾孫○佐理功臣文城君○諱洙之孫○瑞興都護府使諱季孫之女○義州牧使張公孟昌之外孫也○婦則修備閨範○飭整事親○接族雍雍○如也○奉汗主饋挻挻如也○一時稱內助之賢者咸歸焉○公生於成化十三年丁酉○正月七日○以嘉靖二十二年癸卯○六月十九日卒于正寢○壽六十有七歲○夫人生於成化十七年辛丑○十月十七日○後公二十一年○嘉靖四十二年癸亥○十一月七日終○壽八十有三歲○卜公兆○曾哮于衿川縣治北冠○岳山北馬場原○逮夫人之葬○啓其左而袝焉○墓在□議府君□南夫人上下玄宅之後○先君皆就而廬焉○先君之事二親○極誠故○公與夫人亦遇之盡愛○忘其爲置後之子○我先騙貞夫人丹陽禹氏○卽富寧都護府使○諱禮孫之女○生男女各一人○女適生員金琮○生一男三女○男光潤○女長宋惟敬妻○餘幼○濟臣娶宣務郞尙鵬南女○生四男二女○男耆俊壽俊耉俊命俊○女幼○耆俊○生二男○重基厚基○先君嘗爲壟碣伐石而未文○盖有待也○幽坎之誌○亦以故未遑○濟臣自降胞○蒙牧養○以至成立不至於甚淚○而無衣食蠢然○而全無知覺○罔非我祖考騙之訓賜○是讀大俱○無以報德於終天○泣述世歷行治○不敢華溢○追納封前○告願於萬世之下○知此爲德人之藏○而有所欽敬云○某年月日○孫中訓大夫○行司憲府持平○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事○李濟臣百拜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