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공 휘 공달 묘

삼가 생각건대 우리 할아버지는 휘가 공달(公達)이고 자(字)는 선경(善卿)이며 성(姓)은 이씨로 전의인(全義人)이다.

 

고려조의 공신 태사(太師) 도(棹)의 후손이며 본조의 효정공(孝靖公) 휘 정간(貞幹)은 연세든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받들었고 대대로 어짐과 공경을 쌓아 착한 자손들이 이어 나왔다. 관찰사로 영의정을 추중받은 휘 사관(士寬)은 칠형제를 두었다. 과거에 급제하고 삼등공신에 책봉되었고 문과의 으뜸됨이 끝이지 않은 가문으로 부군은 휘(諱)가 예장(禮長)으로 관직은 참의(參議)였는데 판서로 추증받았고 시호는 평간공이다.

 

이 분이 판결사로 참판을 추증받은 휘 시보(時珤)를 낳았다. 정경부인 남평문씨(貞敬夫人南平文氏) 상당군(上黨郡) 대부인(大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 정부인 남양홍씨(貞夫人南陽洪氏), 정부인(貞夫人) 고성이씨(固城李氏)는 공의 사대조부의 부인들이다. 충의위(忠義衛)로써 어모(禦侮) 부호군(副護軍)에 이르기까지 동궁(東宮)의 좌익위(左翊衛)를 제수받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으로 옮겼으며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중추(僉中樞) 부사(府事)로 승진되었고 양주(楊州) 목사(牧使)로 제수받은 것이 공의 관직과 경력의 순서이다. 가슴 속에 천성을 조화롭게 보존하였고, 시서(詩書)와 문자에 넉넉함이 있었다.

 

집안에서는 효성과 우애로 이끌었으며 경계하고 자애롭고 인자하여 뜻과 행실이 종족의 모범이 되었다. 늦게 벼슬길에 올라갔으나 일찍이 급류(急流)를 타서 물러났던 것은 나아가고 처리함을 가볍게 보았던 일이다. 진저(晋邸)를 맞아 간신들을 배척하고 시운을 돕는 공로가 있었으나 원훈공신(原勳功臣)에 오르지 못하였던 것은 공(功)을 자랑하지 아니하는 도량이 드러남이었다.

 

전원으로 돌아옴에 이르러 중귀인(中貴人)이 있어 다시 생각해볼 뜻을 물어보았으나 반드시 스스로 굳게 닫고서 많다고 하였으니 관직을 사양할 절개가 밝았던 것이다. 천순 갑신년(1464)에 태어나 정덕 기묘년(1519)에 돌아가셨으니 그 누린나이가 56세이었다. 서울 한성에서는 관인방(寬仁坊)에서, 해주(海州)서는 태공리(太公里)에서, 광주(廣州)에서는 태장리 선영(胎藏里先塋)인데, 조상과 자손이 묻히고 살아가는 자리이다.

 

광원군(光原君) 휘 백겸(伯謙)의 딸이며 판서(判書)로 추증받은 휘 혁(革)의 손녀로 정부인으로 추증받은 광주김씨(光州金氏)는 덕이 있었고 장수를 누렸으며 살아서는 이미 어김이 없었고 죽어서도 같이 묻혔으니 일생의 배필의 중함이었다.

 

응성(應誠)은 찰방(察方)이고, 사성(思誠)은 부호군(副護軍)이고, 아무는 절도사(節度使)이고 서성(恕誠)은 조졸하였으며, 처사 권우란(權遇鸞), 생원(生員) 이화(李和)는 곧 공의 친아들과 사위들이다.

 

장남은 황(內)을 두었고 황(內)은 아들 충남(忠男)과 효남(孝男)을 낳았고, 의(艤)는 아들 홍준(弘俊)과 정준(挺俊)을 낳았다. 차남은 정(艇)을 두었고 정(艇)은 극준(克俊)과 택준(宅俊)을 낳았다. 3남은 아무를 두었는데 아무는 아들 기준(耆俊) 수준(壽俊) 구준(耉俊) 명준(命俊)을 낳았다. 사위 권(權)은 익(翼)을 두었는데 그는 아들 경가(慶嘉)와 하가(賀嘉)를 낳았다.

 

사위 이(李)는 오(塢)를 두었는데 그는 아들 완과 용(墉)을 두었으며 그는 아들 주(疇)를 낳았으니, 곧 공의 내외 손자와 증손들이다.

 

오호라! 우리 집안의 경사가 오래도록 다하여 없어지지 않았다.

후손의 끝에서도 지혜로움이 있으니 효정공으로부터 그 이래로 모두 귀한 사람으로 꼽힌다. 조상의 덕을 추모하고 공업을 후세에 펴는 효도를 다하지 않아 선군에 이르러서는 돌을 다듬어 놓고 쓴 말을 기다렸으니 이제 감히 더 늦출 수 없다. 명종대왕께서는 마침내 은혜를 내려 선영을 잇게 하셨으니 우리들 먼 자손은 함께 아무런 욕됨이 없도록 하여 나라에 두터운 은총을 어떤 뼈라도 갈아 보답해야 하지 안겠는가. 고손 제신(濟臣)은 감히 묘도를 세움으로 인하여 또한 지문을 쓰고 아울러 글에다 묻어둠을 말해둔다.

 

 

 

恭惟我祖考○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府君○諱公達○字善卿○姓李氏全義人○麗祖功臣○大師棹之胄○本朝○孝靖公諱貞幹○奉壽母至孝○代積仁敬○以世來慶○子觀察使○贈領議政諱士寬○有七男○登八科○策三勳○其府君曰諱禮長○官參議○贈判書○諡平簡公○寔生判決事贈參判府君○諱時珤○貞敬夫人南平文氏○上黨郡大夫人○淸州韓氏○貞夫人南陽洪氏○貞夫人固城李氏○公之四世考騙也○以忠義衛○至禦侮副護軍○除東宮左翊衛○轉通訓○忠勳府經歷○超折衝○僉知中樞府事○以事仍前階○授楊州牧使○公之官歷序次也○沖襟保和○率性有裕○詩書文字○以承有家○孝友雍睦○敬戒玆仁者○志行之儀宗戚也○晩頊睛仕○退急流者○出處之笑顚瞑也○當迎晋邸○有排奸翊運之勞○而不見錄於元功則○不伐之量著矣○逮歸田園有中貴承問之眷○而必自牢而多病則○辭爵之節昭矣○生於天順甲申○卒於正德己卯○中間五十六春秋○其壽考也○京而漢城則○寬仁○坊外而海州則○太公○里廣州則胎藏里先塋者○前後存亡之宅也○光原君諱伯謙之女○贈判書諱革之孫○贈貞夫人○光州金氏○有德有壽○生旣無違○沒又同室者○一生伉儷之重也○曰應誠察訪○曰思誠副護軍○曰諱某節度使○曰恕誠早歿○曰處士權遇 ○曰生員李和○卽公親男及壻也○伯出曰內○有子忠孝○男艤○有子弘挺○俊仲○出曰艇○有子克宅俊○叔出曰某○有子耆壽耉命俊○權出曰翼○有子慶賀嘉○李出曰塢○有子鰒墉○有子疇○卽公內外孫與曾孫也○嗚呼○吾家之慶○久未艾也○以裔末所聞知○自孝靖以下○皆推貴先人○追伸未畢之孝○至於先君琢石待辭○非敢緩也○明宗大王竟訖恩錫○彭續先趾○我用雲仍○共粉何骨○以得無□○以對國家之寵靈邪○孤孫某敢因墓道之竪○而且誌之幷埋玄下云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府君○諱公達○字善卿○姓李氏全義人○麗祖功臣○大師棹之胄○本朝○孝靖公諱貞幹○奉壽母至孝○代積仁敬○以世來慶○子觀察使○贈領議政諱士寬○有七男○登八科○策三勳○其府君曰諱禮長○官參議○贈判書○諡平簡公○寔生判決事贈參判府君○諱時珤○貞敬夫人南平文氏○上黨郡大夫人○淸州韓氏○貞夫人南陽洪氏○貞夫人固城李氏○公之四世考騙也○以忠義衛○至禦侮副護軍○除東宮左翊衛○轉通訓○忠勳府經歷○超折衝○僉知中樞府事○以事仍前階○授楊州牧使○公之官歷序次也○沖襟保和○率性有裕○詩書文字○以承有家○孝友雍睦○敬戒玆仁者○志行之儀宗戚也○晩頊睛仕○退急流者○出處之笑顚瞑也○當迎晋邸○有排奸翊運之勞○而不見錄於元功則○不伐之量著矣○逮歸田園有中貴承問之眷○而必自牢而多病則○辭爵之節昭矣○生於天順甲申○卒於正德己卯○中間五十六春秋○其壽考也○京而漢城則寬仁○坊外而海州則○太公○里廣州則胎藏里先塋者○前後存亡之宅也○光原君諱伯謙之女○贈判書諱革之孫○贈貞夫人○光州金氏○有德有壽○生旣無違○沒又同室者○一生伉儷之重也○曰應誠察訪○曰思誠副護軍○曰諱某節度使○曰恕誠早歿○曰處士權遇 ○曰生員李和○卽公親男及壻也○伯出曰內○有子忠孝○男艤○有子弘挺○俊仲○出曰艇○有子克宅俊○叔出曰某○有子耆壽耉命俊○權出曰翼○有子慶賀嘉○李出曰塢○有子鰒墉○有子疇○卽公內外孫與曾孫也○嗚呼○吾家之慶○久未艾也○以裔末所聞知○自孝靖以下○皆推貴先人○追伸未畢之孝○至於先君琢石待辭○非敢緩也○明宗大王竟訖恩錫○彭續先趾○我用雲仍○共粉何骨○以得無□○以對國家之寵靈邪○孤孫某敢因墓道之竪○而且誌之幷埋玄下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