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정간(貞幹)이요 자는 고부(固夫)이니 전의 사람이다. 고려초에 태사를 지낸 휘 도(棹)의 후손으로 부(父)의 휘는 구직(丘直)이니 또한 당세의 거인 장덕으로 위대하고 덕망높은 인물이었는데 본조에 들어와서 벼슬이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정대부인 낙안김씨이니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인관(仁琯)의 따님이시다. 공께서는 지정 15년(1355) 을미에 출생하시었는데 어려서부터 남다른 특이한 성질이 있으시어 혼정과 신성을 배우지 않고서도 다 잘 아시어서 일찍이 하늘이 내신 효자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전서공(典書公)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조상하러 온 사람들이 그 얼굴빛과 말소리와 슬퍼하는 정경을 보고 모두 이씨 집안에는 그럴만한 사람이 대대로 있다고 하였다. 차차 자라남에 따라 행실 하나하나를 조심성있게 갈고 닦아, 무릇 백성을 다스리는 일과 가정을 꾸려나가는 일들이 한결같이 인의(仁義)에 그 바탕을 두었다. 가정이 화목하여 조금도 도리에 어긋나는 소리를 들어 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신 것을 항상 슬퍼하시어 돌아가신 분을 섬기기를 살아계신 어버이 받들듯이 하였으며, 초상때나 제사때에는 한결같이 주문공의 가례에 따랐고, 고려초에서 불교를 숭상하던 영향을 깨끗이 씻어 버리었다. 나머지 힘이 있는대로 글 공부에 힘을 기울이어 문필이 또한 전아하고 넉넉하면서도 민첩하여 능란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구차스럽게 과거보기 위한 공부는 힘쓰지 않았다. 그리고 오직 대부인의 즐기시는 음식등을 몸소 받들되 남을 시키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의 기색을 보아 화한 얼굴로 대하여, 그 뜻에 따라 어머니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기울이면서도, 항상 자기의 효성이 부족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두려워 하였다. 조정에서 그 행실을 높이 평가하여 여러번 벼슬자리로 불렀으나 취임하기를 즐기지 아니하다가, 만년에 가서야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관찰사가 되었지만 그러나 이것도 어버이를 위하여 자기 뜻을 굽힌 것이므로 일찍 벼슬을 버리고 서원의 송천(松泉)에 있는 별서(別墅)로 물러나와서 살았다. 어버이를 곁에서 모시고 즐겁고 유쾌하도록 함에 힘을 다하였으니, 색동옷 입고 새새끼를 어르는 등으로 어머니를 기쁘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중국의 옛 효자 노래자(老萊子)의 모습을 공에게서 다시 볼 수 있다하고 칭찬하였다 한다. 세종대왕께서 그 효성이 순수하고 돈독하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특별히 기리는 교서를 내리시고, 그 벼슬을 몇 등급을 뛰어 승급시켜서 상경의 위치에까지 끌어 올리고, 이어서 궤장(免杖)과 주악(酒樂)을 주시는 등 총애를 베풀었다. 여기에 또 선덕갑인년(1434) 4월 2일에는 어머니 정부인 김씨에게 특별히 작위를 높여 정대부인으로 봉하시었으니 그 때에 어머니의 나이 102살이고, 공 나이 또한 80여세이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현사와 대부들이 그 영광을 기리지 않는 사람이 없어 다투어 시와 노래로써 이 영광을 읊었다.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조선조 건국 100여년 이래로 세상에서 소위 명문거족이라고 불리는 문중에서도 우리 선조의 모자께서 당시 요순같이 어진 임금이신 세종으로부터 받은 은총만큼 큰 영광을 얻은 집안이 다시 있었던가?

 

아!

참 거룩한 일이로다.

 

공께서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서는 겸하지 못할 것을 겸하시고, 또 다른 사람으로서는 얻지 못할 포서를 얻으시었으니, 이것은 유독 자손만대를 위한 영광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나라의 풍속의 교화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가 하물며 공의 모자의 그 성(聖)스러운 마음가짐으로 반드시 덕을 쌓고 복을 받을 만한 바탕을 닦은 일은 한 두가지로 헤아릴 수가 없다. 그 중에서도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는 두드러진 것만을 몇가지 적어 본다면,

 

그 어머니는 평생동안 일월이 비치는 곳에서 대소변를 본 일이 없었고, 그 아들은 모리꾼에게 쫓기는 새끼 밴 노루를 구하여 주었고, 다라끼 속에 잡히어 있는 물고기를 풀어 놓았다.

 

아! 거룩한지고.

어머니에게는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고, 아들에게는 생명을 구제하는 어진 마음이 있다. 어진 사람은 반드시 오래 산다고 하더니 이 어머니와 이 아들에게서 그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겠다.

 

이상 말한 것이 그 행덕의 대략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문씨이니, 순평군(順平君) 달한(達漢)의 딸이다. 이 어른이 역시 맑은 덕과 어진 행실이 갖추어져 있어서 시어머니 섬기기를 친정 어머니 받들 듯 하였다. 아들 다섯 딸 삼형제를 두어, 맏아들은 사흠(士欽)이니 좌통례(左通禮)로 추증되었으며, 전서(典書)벼슬을 지낸 안경검(安景儉)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사관(士寬)이니 영의정(領議政) 전성부원군(全城府院君)으로 추증되었으며, 한성(漢城) 부윤(府尹)을 지냈으며 문간공(文簡公) 한상경(韓尙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다음은 사신(士信)이니, 첨지(僉知) 중추원사(中樞院事)를 지냈으며, 부윤(府尹) 윤보로(尹普老)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사민(士敏)이니 철원(鐵原)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지냈고 판윤(判尹) 서선(徐選)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다음은 사혜(士惠)이니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고 절도사(節度使) 김제(金友)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맏딸은 판서(判書) 허성(許誠)에게 시집갔으며, 다음 딸은 부사(府使) 허비(許扉)에게 시집갔다. 통례(通禮) 사흠(士欽)의 아들로서 순백(純白)은 참판(參判)으로 추증되었고, 순중(淳仲)은 사직벼슬을 하였으며, 순숙(淳叔)은 훈사(訓師)벼슬을 지냈고, 딸은각각 최진(崔津), 노정산(盧定山), 윤소(尹韶)에게 시집갔다. 부윤(府尹) 사관(士寬)의 아들로서는 인장(仁長)은 참의로 추증되었고, 다음은 의장(義長)이니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으며, 다음은 예장(禮長)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兵曹) 참의(參議)를 지냈으며 군(君)으로 추봉(追封)되었고, 다음은 지장(智長)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며, 다음은 함장(長)이니 문과에 급제하고 또 중시에도 급제하여 예조(禮曹) 참판(參判)을 지냈고, 다음은 효장(孝長)이니 문과와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관찰사(觀察使)를 지냈으며, 다음은 서장(恕長)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군(君)으로 봉작되었다. 딸은 첨지 중추(僉知中樞) 송의(宋衣)에게 시집갔고, 다음딸은 현감(縣監) 김승중(金承重)에게 시집갔다. 첨지 중추(僉知中樞) 사신(士信)은 외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은 승존(承尊)이며 직장(直長)벼슬을 하였고 맏딸은 참판(參判) 유말손(柳末孫)에게 시집갔으며, 다음딸은 생원(生員) 윤심(尹深)에게 시집갔다. 부사(副使) 사민(士敏)의 아들로는, 맏아들은 병덕(秉德)이니 사직(司直) 벼슬을 하였고, 다음은 병균(秉均)과 병정(秉正)이니, 병정(秉正)은 이조(吏曹) 참판(參判)을 지냈고, 딸은 김효우(金孝友), 김익규(金益規), 봉교(奉敎) 안신손(安信孫), 사직(司直) 박원기(朴元基)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군수(郡守) 사혜(士惠)의 아들로서는 효석(孝碩), 우석(友碩)은 모두 부사(府使)이고, 인석(仁碩)은 종사랑(從士郞)이며, 의석(義碩)은 부위(副尉)이고 딸은 이문정(李文庭), 김익(金翊)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이상은 모두 공의 아들 혹은 손자들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다. 선덕9년(1434 세종16) 겨울에 세상을 떠나시니, 시호는 효정(孝靖)이요, 묘는 장단 임강현(林江縣) 우륵리(禹勒里)의 신좌 언덕에 있는데, 정경부인 문씨가 부장(蟄葬)되었다.

 

아! 태사 이후에 자손이 번성하여 동국의 대가가 되었는데 현재까지 600여년이나 지나갔지만 명신과 이름높은 재상이 서로 이어졌는데, 모두 충효와 덕업과 문장과 절행이 있어 대대로 사서(史書)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우리 종족을 세상에서 이른바 첫째니 둘째니 하는 손꼽은 것은, 현재의 우리 환경을 살펴보면, 조정에서 이름을 드날리는 선비들의 십중의 팔구는 효정공의 친손 아니면 외손들이다. 이런 것이 모두 선조께서 덕을 쌓고 어진 행실이 거듭되어 이루어진 나머지 처사로서 오히려 끝이없이 앞으로도 이어져 나갈 것이다. 선인의 공덕에 비추어 보건데 스스로 이렇게 되게 마련이요, 후손의 아름다운 행실에 비추어 보면, 응당 전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비록 이것으로써 돌에 새긴다 할지라도 또한 다음 세대의 믿음과 징검이 되고, 자손의 본받을 법이 되어 끊임없이 전승되어 나가리라.

 

이어 명으로 다음과 같이 엮는다.

 

혁혁할손 태사시어

미쁜 후손 대를 이어

공경이요 대작이며 문학에 훈공일세.

하늘이 내신 효행 우리 선조 특출하니,

증자같은 봉양이요 노래자같은 어리광을,

어머니는 하늘공경 아들은 생명아껴,

이 어머니 이 아들은 옛날의 삼달일세.

덕행이 왕께 들려 효자로다 기리시고

벼슬과 위 높이시고 주악(酒樂) 궤장(免杖) 내리시어

만세영광 드리우니, 온 나라가 기리었고

귀한 포창(褒彰) 높은 행적 풍속의 선도(善導)의 모범일세,

성조(聖朝)에서 얻은 명예 요순같은 임금일세.

다시없는 은총이니 천에 하나 있을건가?

덕과 인(仁)을 거듭쌓아 후손들의 그늘되니,

효자 가문 창대(昌大)하여 세상에서 첫 손꼽지.

지금 세상 짝이 없고 옛날에도 없던일.

여경(餘慶)이란 옛 말씀이 거짓아님 내 알겠네.

장단(長湍)땅 임강우륵(臨江于勒) 영혼이 잠드신 곳,

봉분있고 비가 없어 지극한 덕 묻힐세라,

여러 후손 뜻을 모아 새로 비를 마련했네,

선조행적 알려거든 이 명을 읽어보소.

 

경태7년 병자년(1456)에 손자 정충출기 적개공신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 전성군(全城君) 서장(恕長)이 지음

 

 

 

公諱貞幹○字固夫○全義人也○本出麗太師諱棹○父諱丘直○亦當世鉅人長德○入本朝○官至戶曹典書○騙貞大夫人○樂安金氏判典校寺事仁琯○其考也○公生于至正十五年乙未○幼有異質○晨昏定省○不學而能之○業以天孝聞○典書公卒○來吊者見其顔色聲容○皆曰李氏世有其人○及長○節節砥行凡所以治齊一出於仁義○家庭楫睦無異辭○常痛早孤○事亡如存○至於喪祭○一遵朱文公家禮○痛洗勝國所尙浮屠法○餘力功文○文亦典雅贍敏○無所不能○然不屑屑於擧子業○唯事大夫人○供甘腿而躬不以人○承顔順志○務適其歡心○常恐不盡不至○朝廷高其行○屢徵不肯就○至觀察使○然爲親屈也故○早懸車退居于西原之松泉別墅○左右親側○恰恰愉愉○弄雀雛○供慈飢○世謂老萊之戱○復覩于公云○世宗聞其孝純篤○特降褒書○超陞其官秩○是上卿仍賜免杖酒樂○以寵之○宣德甲寅四月二日○特加封○母貞夫人金氏○爲貞大夫人時年一百有二○公年亦八十餘一○時賢士夫人○莫不爲之艶榮○爭以詩歌之○不至國朝百餘年來○世號爲名門鉅族○其有如我先祖母子之○所嘗得於堯舜其君乎否○噫公旣兼人所不能兼者○又得人所不能得之○褒書此不獨爲子孫萬世榮○將大有補於風敎也哉○公之母子○其所處心○必本於積德作福者○難一二計○然以世所稱最著記母則○平生不向日月便旋○子則嘗救避矢之孕獐○又放在筐之胴魚○噫母有敬天之心○子有濟物之仁○仁者必壽○於是母是子信矣○此德行之大略矣○貞敬夫人文氏○順平君達漢之女○亦有淑德懿行○事姑如其母○擧五男三女長曰士欽○贈左通禮娶安典書景儉女○次士寬○贈領議政○全城府院君行漢城府尹○娶韓文簡公尙敬女○次士信○僉知中樞院事○娶府尹尹普老女○次士敏○鐵原都護府使○娶判尹徐選之女○次士惠○武科郡守○娶金節度友女○長女適判書許誠○次適金孝誠○次適府使許扉○通禮有子曰淳伯○贈判○曰淳仲○司直○曰淳叔訓師○女適崔津○盧定山○尹韶○府尹有子曰仁長○贈議○曰義長○武縣監○曰禮長○文兵曹議追封君○曰智長○文注書○曰牽長○文重試○禮曹判○曰孝長○文重試觀察使○曰恕長○文大司憲封君○女適僉樞宋衣縣監○金承重僉樞○有子曰承尊直長○女適判柳末孫○生員尹深○府使有子曰○秉德○司直秉均秉正吏曹判○女適金孝友○金益規○奉敎安信孫○司直朴元恭○郡守○有子曰孝碩○友碩○皆府使○仁碩從仕郞○義碩副尉○女適李文庭○金翊○是皆公之子若孫也○宣德九年冬卒○諡孝靖○墓在長湍林江縣禹勒里辛坐之原○貞敬夫人文氏蟄焉○嗚呼○自太師後○蔚然爲東國大家○於今六百有餘○名臣碩輔○往往相望○要皆以忠孝德業文章節行○代不絶史○吾族○世所謂甲乙者○顧今立朝之士○爲孝靖公內外孫者○十八九○皆先祖積德累仁之餘慶○尙未艾也○徵諸先功德○有自也○徵諸後行○懿有傳也○雖以此○銘之○亦足爲徵信於來後○而爲法於子孫也○無窮矣○銘曰○赫赫太師○世有聞孫○乃公乃卿○以文以勳○若夫天孝○寔我先祖○曾子之養○老萊之舞○母則敬天○子則濟物○是母是子○古之三達○德行升聞○王曰孝子增秩增封○賜樂賜免○萬世垂榮○一國稱孝○崇褒卓行○永補風敎○得於聖朝○堯舜其主○曠世○恩數○千一遭遇○積德累仁以惠其後○孝門昌大○世稱族茂○於今難亢○雖古亦無○餘慶古語○信不我誣○瞻彼臨湍○英魄所宅○有封無碣○恐泯至德○諸孫合謀○刻示無極○欲知先烈○請考是石○景泰七年丙子○孫精忠出氣敵愾功臣○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全城君恕長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