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간공 휘 서장 묘

이씨는 옛날부터 관족으로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대대로 인물이 그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공의 증조(曾祖)는 휘가 구직(丘直)이니 참찬 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추봉(追封)되었고 조(祖)의 휘는 정간(貞幹)이니 중추원사(中樞院事)로서 시호는 효정공(孝靖公)이고, 고의 휘는 사관(士寬)이니 여러 관위(官位)를 거쳐 한성(漢城) 부윤(府尹)을 지냈는데 공이 공신(功臣)이 된 연유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봉되었으니 모두 어질고 유능함으로써 일세에 이름을 드날렸다. 공의 휘는 서장(恕長)이요 자(字)는 자충(子忠)이니 문과에 급제 출신하여 맑고 뚜렷한 벼슬자리를 두루 거치었으나, 몸가짐을 삼가고 두려움을 앞세웠다. 1467년(세조13 정해)에 적신 이시애(李施愛)가 북도에서 반란을 선동(煽動)하여 일으키자, 세조께서 장수(將帥)에게 명령하여 이를 토벌토록 함에 있어 공으로 그 막객(幕客)을 삼았는데 적군을 토멸한 뒤에 특별히 적개공신(敵愾功臣)의 호를 주시고, 전성군(全城君)으로 봉작하였다. 조금 뒤에 함흥부(咸興府) 부윤(府尹)으로 임명되니, 북쪽 사람들의 흉흉하던 인심이 일조에 진복(鎭服)되어 현지에서 관찰사(觀察使)로 승진되었는데, 그 곳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그 은혜를 사모하고 있다. 그 뒤에 남도의 진휼(賑恤) 구제를 맡았을 때에도 구휼된 사람이 매우 많았고, 경조(京兆)의 좌윤(左尹)으로 있을 때에는 부정을 적발(摘發)하는 것이 귀신 같았으므로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개성(開城) 유수(留守)가 되었는데 그 때에도 업적이 크게 드러났다.

 

아! 어릴 때와 장년(壯年)일 때에는 훌륭한 자제이었고, 늙고 현달한 뒤에는 어진 부형이었다. 여러 벼슬을 지냈지만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털끝만큼도 과오를 범한 일이 없었다. 누린나이 62세이었으며, 벼슬길에서 세상을 떠났다. 청주송씨(淸州宋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윤수(允粹)이니 통훈대부(通訓大夫) 평시령(平市令)을 지냈는데, 젊어서부터 재주가 있어 해주(海州) 판관(判官)이 되었을 때 치적을 많이 나타내어 모두 말하기를 이씨 집안에 사람다운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다음은 윤순(允純)이니 겸 선전관(宣傳官)이었고, 다음은 윤정(允正)이니 진사(進士)이었는데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윤중(允中)이니 생원(生員)이었고, 맏딸은 이제순(李悌順)에게, 다음딸은 남계(南矜)에게 각각 출가하였는데 모두 선비 집안의 대족이었다. 공은 천성이 간결하고도 중후하여, 규각을 겉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으나, 큰 일에 임하거나 의혹(疑惑)이 개재되는 일을 처결할 때에는 늠연(凜然)하여 범하지 못할 위엄이 보였다.

 

아! 어진 선비여!

하늘은 어찌 하여 이렇게 일찍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셨는가? 정대부인 송씨(宋氏)는 관향이 청주(淸州)이니 대구(大丘) 군사(郡事) 처공(處恭)의 딸이오, 의령(宜寧) 현감(縣監) 구(俱)의 손녀이며 그의 어머니는 의인(宜人) 김씨(金氏)이니 해주(海州) 목사(牧使) 학지(學知)의 딸인데. 영락 임인년(1422 세종4) 2월 갑인에 부인을 낳았고, 임진년(1472) 2월 임진일에 별세하여 공과 더불어 파주(坡州) 마장원(馬場原)에 장사지내었다.

 

이 묘갈문(墓碣文)의 지은이는 알 수 없다.

 

 

 

李古爲官族○稱世有人○公曾祖諱丘直○追封贊○議政府事○祖諱貞幹○爲中樞院事○諡孝靖○考諱士寬○歷官至漢城府尹○以公功臣之故○追封領議政○以賢能○鳴世○公諱恕長字子忠○以文科出身○歷敭顯仕○謹飭畏愼○歲丁亥○賊臣李施愛煽亂於北道○世祖○命將往討○以公爲幕客○賊旣就戮○特賜敵愾功臣之號○封爲全城君○俄拜咸興府府尹○北人洶洶之心○一朝鎭服○仍留爲觀察使○民至今思之○後賑恤於南道○救活居多○左尹於京兆發摘如神○爲大司憲○爲開城留守○厥有聲績○嗚呼○幼壯爲良子弟○老大爲賢父兄○歷官處事○無纖毫過擧○亨年六十二○以其官終○娶淸州宋氏之女○生四男二女○長曰允粹○通訓平市令○少有才幹○爲海州判官○六期大治○人皆曰李有子也○次曰允純○兼宣傳官○次曰允正○進士○先公亡○次曰允中○生員○長女適李悌順○次適南矜○皆士家大族○公天性簡重○不露圭角○至於臨大事決大疑○凜然有不可犯之色○噫賢矣哉○何天奪之遽也○貞夫人宋氏貫淸州○知大丘郡事處恭之女○宜寧縣監俱之孫○騙宜人金氏○海州牧使學知之女○永樂壬寅二月甲寅○生夫人○壬辰二月壬辰卒○葬于坡州馬場原云○撰者未詳